[책잡기-2024-029] 보다 - 김영하 - 별 셋 - 0607
92쪽
에피쿠로스는 ...... 이렇게 말했다. " ...... 따라서 죽음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점을 올바르게 통찰하면, 우리의 유한한 삶은 즐거울 수 있다. 왜냐하면 이 통찰이 우리 삶에 무제한적인 지속성을 부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살고자 하는 욕구를 없애기 때문이다. ...... " ...... 가서 지구의 공기와 물과 중력, 늘 네 곁에 있었지만 알지 못했던, 저 찬란하지만 유한한 것들을 죽음이 찾아오기까지 마음껏 즐기라.
122쪽
그(한 연극연출가)는 이렇게 말했다. ...... "인간은 원래 연극적 본성을 타고납니다. 이 본성을 억누르면서 성인이 되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되려는 욕망,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욕망을 억누르면서 사회화가 되는 겁니다." ......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존재,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끝없이 변화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게 무엇인지 영원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가장 연기하기 어려운 장면은 바로 우리의 일상일 것이다.
159쪽
인기가 있는 옷은 순식간에 팔려나간다. 그리고 새로운 옷으로 채워진다. 사라진 옷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오직 현재만이 존재하는 곳, 패스트패션의 세계다. 대형서점은 어떤 면에서 패스트패션을 닮아가고 있다. ...... 위안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서점에는 스테디셀러라는 명예의 전당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 범주에 속하게 되면 무시무시한 속도 경쟁에서 살짝 벗어나 여유를 즐길 수 있다. 불행히도 이런 행운을 누리는 책은 매우 드물다.
160쪽
스위스 명품 시계 회사 사장의 인터뷰에 힌트가 있다. 당신네 회사 시계는 왜 그렇게 비싸냐고 묻는 기자에게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필요가 없으니까요." ......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은 값이 떨어집니다. 많은 회사들이 뛰어들어 서로 경쟁하며 값싸게 생산할 방법을 결국 찾아내거든요. 저희가 만드는 시계는 사람들에게 필수품이 아닙니다. 그러니 값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165쪽
부자는커녕 아빠조차 되기 힘들다.
165쪽
<변호인>에서 식당 밥값이나 떼어먹던 가난뱅이가 유능한 아버지로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은 아파트의 매입이다. 그 시절의 이상적인 아버지란 아파트를 직접 지은 노동자가 아닌 남이 지은 아파트를 현찰로 구입할 수 있는 소비자라는 것을 영화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 유능하면서 도덕적인 아버지가 되겠다는 웅대한 포부 따위 가뭇없이 사라진 자리에 '친밀한 아버지'라는 새로운 환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TV가 가장 먼저 그들을 호명한다. '아빠! 어디 가?'냐고.
170쪽
프랑스나 일부 유럽 국가들에는 일종의 신모계사회가 출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만남과 이별이 쉬워지고 출산에 대한 인센티브는 커지면서 가장 확실한 연결인 모계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된다.
208쪽
보고 들은 후에 그것에 대해 쓰거나 말하고, 그 글과 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접하지 않고서는, 다시 말해, 경험을 정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타자와 대화하지 않는다면, 보고 들은 것은 곧 허공으로 흩어져버린다. ...... 지금까지의 내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생각의 가장 훌륭한 도구는 그 생각을 적는 것이다. ...... 정해진 마감일에 맞춰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일상에서 보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연하게 써내도록 스스로를 강제하게 된다. 그렇게 적은 것을 다시 보고 고치는 것이 그 마지막이다. 이 순환이야말로 한 사회와 세상을 온전히 경험하는 방법이 아닐까.
[다음 책] 보다 - 김영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