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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잡기-2024-028] SF 작가입니다 - 배명훈 - 별 셋 - 0603

몽자크 2024. 6. 3. 00:01

SF 작가입니다 - 배명훈


44쪽
아무것도 없는 불모지의 단계를 지나, 마침내 실재가 관념보다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일종의 패턴처럼 관측되는 현상이 있다. '진정한 OO'를 찾는 일이다. 최근에 가장 많이 보이는 예로는 "페미니즘은 인정하지만 당신이 하는 것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조는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진정한 의미의 노조가 아니다"처럼 비슷한 예를 찾는 것도 어렵지 않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선험적 관념의 역할이 결실을 맺어 그 관념을 닮은 실제 사물들이 마침내 풍성하게 자라나는 시기에, 진정한 사물이란 과연 어떤 사물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정답은 '눈앞에 놓여 있는 그 사물'이다. 그것 말고 실재하는 것은 없다. 세속의 사물은 늘 불완전하고 성에 안 차지만, 천상의 사물보다 한 가지 측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실제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53쪽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은 매번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다. 

69쪽
그래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교과서 안에 박제해두지 않고, 본질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잡아채서 내가 창조한 세계에 놓여 있는 재료로 다시 조립하는 일을. 그것이 내가 하는 SF다. ...... ​(<티켓팅&타겟팅>은) 군사학과 티켓팅처럼 서로 연결되기 어려워 보이는 소재가 난데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더 좋아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군사학이라는 학문을 책 밖으로 끌어내 우리 일상과 연결시킬 수 있었기에 가능한 결합이다. 

111쪽
문제를 명확하게 정의해보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별수 없이 집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전혀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상황. ...... 분명 작가로 데뷔를 했고 그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어쨰서인지 "어서 직장을 찾아야 할 텐데"하는 걱정을 하는 것이다. "어서 첫 소설집을 내야 할 텐데"나 "어서 문학상을 타면 좋을 텐데"가 아니다. "어서 취직을 해야 할 텐데"다. 

113쪽
작가는 멍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어도 일을 하는 중이라지만, 막상 해보면 기나긴 구상 단계를 지나는 작가의 모습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한심할 때가 있다. 많은 구상 과정이 결과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 충분한 준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써버리면, 매일매일 조금씩 설익은 엉터리 글만 쥐어짜는 꼴이 되는 사람도 많다. 작가처럼 보이기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다. 

140쪽
"일확천금을 꿈꾸며 성실하게!" ...... "일화천금"을 굳이 모토에서 언급하는 것은 이 점을 껄끄러워하지 않고 인정하려는 의도다. 성공의 그림자는 기나긴 좌절이므로, 이렇게 객관화해두는 것만으로도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된다. 

146쪽
타인의 성공은 누구에게나 따끔하다.

147쪽
내용은 좀 웃겨도 상관없다. 당신이 그 좌우명대로 해낼 수만 있다면.

147쪽
성실하게 사는 일은 가계와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연습을 꾸준히 하고 글이 계속 잘 써지면 근육처럼 올라오는 자존감을 보게 될 수도 있다.  

148쪽
특히 친한 동료가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되도록 짧게 절망한 다음 묻어갈 방법을 재빨리 모색하자. 옹색하게 들리겠지만, 먼 길을 함께 가는 사이란 그런 것이다. 그가 낸 길을 수월하게 따라간 다음, 내가 앞서는 날이 오면 그를 위해 길을 내는 것. 

200쪽
작가란 다음 글을 쓸 계기가 충분히 모여 있는 사람이다. 글을 쓰는 계기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 부와 명예만큼 강력한 계기는 아니지만, 글쓰기에 대한 애정 혹은 도저히 쓰지 않을 수 없는 심리 상태 같은 내면의 동기도 대단히 중요하다....... 훌륭한 글을 써내는 동료 작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은 다음 글을 쓰는 좋은 계기가 된다. ...... 마지막으로 다룰 중요한 계기는 독자다. 

205쪽
작가에게는 작은 무대라도 독자와 교감하고 한 주기를 완성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정당한 보수와 연결된 지면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는 지금 등단의 효과를 해체한 후 재조립하는 과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런 환경에서 작가의 자격을 완성해가려면, 가수가 작은 무대에 오르듯 작은 지면을 찾아 나서기도 해야 한다. 헐값에 저작권을 가져가는 곳보다는 아예 돈이 오가지 않는 곳이 나을지도 모른다. SF 작가로 데뷔한 후, 작가가 맞는지 혼란스러워했던 몇 년 동안 내가 한 일 또한 바로 그 일이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작가는 자신만의 독자층을 만들어낼 수 있다. 
​​
210쪽
제일 중요한 브랜드는 결국 작가 자신인 셈이다. 

221쪽
잘 단련된 소설가는 이걸 어디다 쓰나 싶은 이상한 자원도 어떻게든 돈으로 바꿀 수 있다. 보통은 폐기 비용을 들여서 처리해야 할 나쁜 경험을 가지고도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 작가에게 환금은 위로다. ...... 우리가 우리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위안거리다. 적어도 어떤 문제는, 내 인생을 통째로 휘감을 만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 인간은 고난을 극복하고자 하지만 모든 괴로움을 이겨내지는 못한다. ...... 섬세한 언어는 뭉쳐 있는 응어리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도구다. 

233쪽
미국에서 영어 수업을 들으면서 느낀 점인데, 미국인들은 처음 본 사람과 인사를 나눌 때 나이나 학력, 결혼 여부 등 살아온 내력을 덜 묻는다. 묻기는 하지만, 한국인들이 상대가 거주하는 부동산 현황까지 들어야 신상 파악이 완료되는 것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현재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당사자의 상태와 그가 직접 한 말, 대략 그 지점이 미국식 신상 파악의 출발점인 셈이다. 딱 들어도 상당한 장점이 있는 접근 방식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국제 관계를 이런 식으로 이끌어가려고 한 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 반면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 학계에서는 데이터 처리보다는 역사 공부의 비중이 높다. 현재 상황 자체보다는 일이 진행되어온 과정과 그 맥락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뜻이다. ...... 미국에서 꽃핀 제국의 문학 장르인 SF의 기저에 깔려 있는 미래에 대한 가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260쪽
우리는 늘 불안하고, 누군가에게 뒤쳐져 있으며, 많은 경우 실제로 절박한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래서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다. 자고로 예술가란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 몫은 다 하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 내 한 몸 잘 건사하는 것이야말로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다. 우리가 각자의 칸막이 안에 갇혀 있다면. ...... 개인의 데뷔, 개인의 성장, 개인의 성공과 금의환향, 혹은 오랜 기다림. 하지만 어느 날 우리가 우리 주위에 놓여 있는 칸막이를 걷어내고 같은 공간 안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서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무슨 일을 해낼 수 있을까? 


[네이버 책] SF 작가입니다  - 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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