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관에 대하여

젋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2-1

몽자크 2016. 10. 25. 00:00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  NAVER 책 정보

 

p. 50

실제로 아테네 사람들은 백치라는 단어를 요즘 시대보다는 훨씬 포괄적으로 사용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을 백치라고 정의했네.

 

p. 60

편지를 마치면서 틈만 나면 내가 하는 말을 들려주고 싶네. 모름지기 말은 늘 그 뜻을 유의해야 하네.

 

p. 64

칼 포퍼의 주장대로, 논쟁을 하다보면 막상막하인 양측이 실제로 상대를 납득시키거나 전향시키는 경우는 아주 드물어. 하지만 올바르게 진행된 논쟁에서 양측 모두가 처음 논쟁을 시작할 때와 동일한 입장을 유지한 채 논쟁을 마치는 경우도 아주 드물지. , 논쟁을 하다보면 양보와 수정의 과정이 일어나고, 따라서 양측의 최초 입장이 겉보기엔 변함없는 것 같아도실제로는 변하기 마련이네. 결코 흔들리지 않는 아무리 강력한 신념체계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야. (아이작 도이처는 오래된 화석처럼 변해버릴 소련을 예지라도 한 듯 이런 말을 했네. “상황이 그대로일수록 상황은 더욱 변한다.”)

 

p. 67

내 친구 이스라엘 샤하크 박사는 내가 여러 사안에 관해 의견을 물을 때면 매번 아주 차분하고 신중하게 대답하네. “다행스럽게도 의견의 대립이 나타나고 있어.” 그의 이 대답에는 경박함이 없네.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직접 위험한 삶을 겪어오면서 오로지 사상과 원칙의 공개적인 충돌만이 사안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거야. 물론 충돌은 고통스러워. 하지만 어떤 사안에서도 고통 없는 해결책이란 존재하지 않네. 오히려 고통 없는 해결책을 추구하다간 아무런 요점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해결책이 도출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훨씬 고통스런 결론이 나온다네. 그리고 이건 현실도피의 극치일세.

 

p. 99

양심을 마비시키는 일상적인 것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냐고 물었지?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사소하면서도 어처구니없는 사례를 들려주겠네. 매일 <뉴욕타임스> 1면에는 박스 처리된 표어가 박혀 있다네. ‘게재할 만한 모든 뉴스.’ <뉴욕타임스>는 이 표어를 하루도 빠짐없이 수십 년이 넘게 부르짖어왔지. 내 생각에 이 정론지를 즐겨 읽는 독자들은 대부분 <뉴욕타임스>의 정신세계를 표상하는 이 거만한 표어에 무감각해졌을 거야. 하지만 나는 매일 <뉴욕타임스>에 이 영리한 척하고 뻐기고 우쭐해하는 백치 같은 표어가 여전히 실려 있는지를 확인하네. 그런 뒤 여전히 내가 그 표어를 보면 짜증이 나는지를 확인하지. 다시 말해 내가 그 표어를 보면서 자화자찬하고 거들먹대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명백하게 느끼는 것 말고도 왜 날 모욕하는지, 정말 날 바보로 아는 건지, 그리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한다면 그때 나는 적어도 내가 여전히 맥박이 뛰며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네.

어쩌면 자네는 이보다 더 엄격한 정신수양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네만, 아무튼 나는 매일 이런 짜증스런 경험 덕분에 내 생명을 하루하루 연장하고 있다고 믿네.

 

몽자크 曰                  99, 100쪽에는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첫 번째 편지>부터 <열여덟 번째 편지> 가운데 가장 짧으면서도 가장 강렬한 <여덟 번째 편지>가 실려 있다. 내가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의 글을 읽으면서 백 번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는 여기서 드러난다. 히친스가 지목한 그의 생명을 하루하루 연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꼽는 내 삶의 원동력인 것이다.

히친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즐겨 찾는 MBTI 관련 정보 사이트 ‘CelebrityTypes.com’을 통해서다. 여기서 히친스는 나와 같은 유형인 INTJ로 분류돼 있다. 저널리스트라는 그의 타이틀이 대번에 이목을 끌었다. <논쟁>, <신은 위대하지 않다>, <인권 이펙트> 등 그가 내건 저서의 제목들 역시 취향 저격이었다.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는 히친스와의 첫 만남을 러블리하게 성사시켜 주었다. 그의 다른 글에 대한 기대감은 덕분에 이미 한껏 치솟은 상태다.

 

p. 121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 눈에 짜증나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으로 비췬다는 걸 잘 알지. 심지어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짜증나고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걸 잘 알고 있네. (원래 신사란 의미는 일부러 의도한 경우를 제외하곤 무례하지 않은 사람을 말하지.) 그런 면에서 나는 신사이긴 틀린 것 같아. 언젠가 내 친한 친구는 내 입술, 아마도 윗입술이라고 말했던 걸로 기억하네만, 아무튼 내 입술이 종종 지나치게 비웃는 듯한 표정을 띤다고 말해준 적이 있고, 아내는 한 술 더 떠서 내 입술이 그런 모양인 걸 내가 전혀 알지 못한다고 하더군. 나는 이런 지적을 당했을 때 꽤나 놀랐고, 내 의도와는 달리 우발적으로 이런 무례한 표정을 짓는 버릇이 얼마나 오래된 습관인지를 한동안 꽤나 고민했네. 게다가 내가 재치 있는 말주변을 과시하면서 논쟁을 벌이고 치고받을 떄, 실제로는 내가 의도치 않게 이런 표정을 지으며 상대방을 격분하게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당황스러울 따름이네.

 

 

 

몽자크 曰                종교에 대해 그는 할 말이 많았다. 이 역시 동감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용수철처럼 틈만 나면 튀어나오니까.

 

p. 101

나는 무신론자도 아니고 그보다는 오히려 유신론을 반대하는 이른바 반유신론자라고 할 수 있네. 나는 모든 종교가 똑같은 거짓에 대한 각기 다른 설명일 뿐이며, 나아가 교회의 영향력과 신앙의 효과가 매우 해롭다고 믿네.

 

p. 115

비판적인 반대파로 살려면 개인의 자존감과 능력을 믿어야만 하는데, 종교는 이런 믿을을 집단주의라는 역겨운 형태로 변모시키네.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치장해도 집단주의에는 강압적인 저의가 담겨 있네. 그리고 사실 자네가 아무리 인류의 결속이 중요하다고 믿어도 자네가 죽는다고 해서 조종이 울리는 건 절대 아니야. 종교는 늘 그랬듯 통제의 수단이네.

 

p. 117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학이 우주 기원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게 증명됐고 인간의 본성, 다시 말해 인간의 유전자와 다른 종과의 관계가 점점 더 명확하게 규명되고 있네. 그 반면에 신이 인간의 삶을 예정해 놓았다는 주장은 유의어 반복과 무한회귀에 근거했음에도 (아니, 어쩌면 오히려 그 때문에) 마치 상자 안에 가둬둔 용수철 인형처럼 틈만 나면 튀어나오고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