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잡기-2024-038] 우리의 사이와 차이 - 얀 그루에 - 별 둘 - 0715
60쪽
무력하다는 것은 타인이나 조력 기관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타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하나의 대상물이 된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 타인의 시선이 머무르는 하나의 대상물이 되면 자기 자신에 관한 자의적 의식, 즉 주변의 기대에 따라 항상 사전에 조율된 의식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의와는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이미 만들어진 삶의 한 형태 속에 내가 배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81쪽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현실적이라는 이론이 있다. 그들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 때문이다.
99쪽
자기 자신에 관한 비밀스러운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세상을 되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99쪽
나는 꽤 어린 나이에 처음 휠체어를 몰았다. 하늘색 스크린과 강력한 후륜 구동의 '페르모빌' 휠체어. 나는 '몰았다'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휠체어에 앉아 있다는 것은 움직임을 연상시키지 않는 수동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조종하다'라는 단어는 내가 사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단어다.
105쪽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직전, 난생처음으로 여름 캠프에 참가했다. 희귀한 병을 앓는 아이들을 위한 특수 캠핑 프로그램이었다. 희귀한 병을 앓은 우리. 그러한 표현은 내게 절대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병은 내게만 국한된 것이지 다른 아이들의 것은 아니다. 나는 그러한 공동체의 한 부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캠프는 청소년을 위한 것도, 사람들을 위한 것도, 환자들을 위한 것도, 사용자들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선의의, 잘 규제된, 복지의, 보살핌의 표현이었다.
126쪽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시에, 다른 세상을 향한 동경을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모든 상실의 경험이 고통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경험은 슬픔을 동반한다. 슬픔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 일, 더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 때문에 생겨난다. 슬픔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과 앞으로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생겨난다. 이때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일 수도 있다.
150쪽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문제 그 자체로 인식될 여지가 많다.
164쪽
성격은 내부적 필요성과 외부적 요구 사이에서 형성된다. 이때 어떤 요소가 더 중요하다고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나의 지인 중에는 나만큼이나 쉽게 넘어지는 사람이 한 명 있다. 하지만 그의 집은 잘 정돈되어 있지 않다. 바닥은 갖가지 장난감과 이런저런 물건들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외부적 요구인가, 아니면 내면적 필요성인가? 나의 삶은 그의 삶보다 더 많은 강제적 상황을 내포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특출나게 예민한 편인가?
170쪽
나의 병은 한계를 만들었지만, 나는 매년 이 한계의 벽이 조금씩 확장되는 조용한 기적을 경험하고 있다.
172쪽
내겐 본보기로 삼을 만한 예가 없다. 비교가 불가능한 단 하나의 몸, 바로 나만의 몸이 있을 뿐이다.
202쪽
이다는 나와 사귀기 시작한 날부터 내게 찍힌 낙인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다에게 영향을 주었다. 사람들은 내게 묻지 못했던 질문들을 이다에게 던졌다. 예의 바른 관심부터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 내심 걱정하는 척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한 수천 가지의 세세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 그들이 이다에게 던지지 못했던 유일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은 '왜 당신은 그의 낙인을 함께 나누는 일을 선택했나요?'라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낯선 사람들에게 주기엔 너무나 크고 중요한 것이다.
203쪽
휠체어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수치심을 의미하고, 휠체어를 프로필 사진의 구석에 보일 듯 말 듯 배치하는 것은 이중적 수치심을 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