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잡기-2024-036] 뭐라도 되겠지 - 김중혁 - 별 셋 - 0701
17쪽
시간은 늘 우리를 쪽팔리게 한다. 우리는 자라지만, 기록은 남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만, 기록은 정지하기 때문이다. 자라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쪽팔림도 없을 것이다. 반대로, 쪽팔림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49쪽
완벽한 싱글 라이프는 아니지만 나는 이곳에서 싱글 라이프를 즐기고 있다. ...... 내가 작업실을 마련한 것은, '싱글'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라이프'가 뭔지 깨닫기 위해서다.
73쪽
내가 생각하기에 '재능'이란, (천재가 아닌 다음에야) 누군가의 짐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나에 대한 배려 없이 무작정 흐르는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운 다음에 생겨나는 것 같다. 그래, 버티다 보면 재능도 생기고, 뭐라도 되겠지.
* 뭐라도 되겠지. 이 문장을 제목으로 하자는 의견을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이게 좋은 뜻일까? 긍정이긴 하지만, 때로는 체념처럼 들리지 않을까? 하긴 체념이어도 상관없다. 작은 체념이 들어 있는 긍정이야말로 튼튼한 긍정이 아닐까.
107쪽
세상에는 아름다운 소리와 아름답지 않은 소리가 있는 게 아니다. ...... 문제는 소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그 소리를 내는가. 언제 그 소리를 듣는가. 어떤 마음으로 듣는가. 어떤 크기로 듣는가. 그게 문제였다. 결국 인간이 문제였다.
127쪽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렸을 때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로를 이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이해하지 않은 채 그냥 지냈고, 그렇게 시간이 쌓였고,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함께 보낸 시간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134쪽
생각해보면 라디오를 듣는 일은, 심심한 마음과 친구가 되는 일이었던 것 같다. 라디오를 틀어놓고 낙서를 하거나 책을 읽거나 공상을 할 때엔 심심함을 떨쳐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심심한 마음을 즐길 뿐이었다. 요즘의 라디오 방송이 수다스러워진 것도 심심함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라디오가 인터넷이나 TV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더 재미있는 방송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
156쪽
"저는 마음이란 산란해지기 위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산란해지지 않는 마음은 이미 마음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마음 심心이라는 글자를 좋아하는데, 특히 그 글자의 생긴 모양이 시선을 모읍니다. 권權이나 군軍 같은 글자는 획들이 모두 확실하게 붙어 있지만 심心은 각각 떨어져 있습니다. 즉 처음부터 산만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산란하게 하지 말라는 것은 마음을 갖지 말라는 뜻이며, 깜짝 놀라고, 두근거리고, 용기 없이 우물쭈물하는 등의 인간적인 감정을 갖지 말라는 뜻입니다."(고미 타로의 책 <어른들(은, 이, 의) 문제야> 중) ...... 예술에 목표 같은 건 없다. 집중을 요구하는 권權이나 군軍에는 뚜렷한 목표가 있겠지만, 마음이나 예술에는 목표가 없다. 마음을 기록하는 예술은, 그러므로 산만한 자들의 몫이다.
163쪽
나는 하루빨리 교복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교복이 없어지고 남자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무겋게나 입어보고, 옷을 찢어보기도 하고, 말아보기도 하고, 잘라보기도 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시도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라난다면, 최소한 자신의 옷은 자신이 직접 고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패션만의 문제가 아니라 허용과 관용의 문제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편견 없이 대할 수 있느냐가 패션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 제일 먼저 서로의 옷을 바라본다. 옷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한다. 아이들이 더 많은 옷을 경험할 때, 내 친구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알게 될 때, 내가 좋아하는 옷과 친구가 좋아하는 옷이 어떻게 다른지 알게 될 때, 우리의 판단은 좀 더 부드러워질 것이다.
268쪽
예술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예술을 배운다는 것은 더 많은 질문을 배우는 것이다. 예술을 가르친다는 것은 세상에 더 많은 질문이 생기도록 돕는 일이다. ...... 왜 자꾸만 예술을 가지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왜 자꾸만 물음표를 우그러뜨려서 마침표로 만들려는 것일까. ...... 예술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이 낯 뜨거운 이유는,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삶이 무엇인지 서로에게 묻지 않아도 모두들 뜨겁게 살고 있듯, 예술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사람들 마음속엔 각자의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72쪽
우리가 풍자를 하는 이유는 저 높은 곳의 누군가를 우리 곁으로 끌어내리기 위해서인데, 누군가의 권력을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위해서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농담을 하는 우리가 무기력해지고 시시해진다. 결국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우리를 주눅 들게 만든다.
276쪽
그는 대통령으로서 화가 많이 난다고도 했고, 대통령직을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했다. 대통령도 직업이다. 청와대도 직장이다. 누가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덫이 될 줄 뻔히 알면서 그는 매번 말했다.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말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 유머가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아닐 거다. 그럴 리 없다. 그렇지만 힘과 폭력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낫지 않나?
280쪽
나와 네가 손을 잡으면 우리가 된다. 나와 네가 손을 잡는 이유는 한 줄로 서서 더 먼 곳까지 뻗어나가기 위해서다. 원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나와 네가 손을 잡아 동그란 원을 만들어버리면 다른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는 울이 되고 만다. 그곳에 갇히는 순간 우리는 무서워진다.
307쪽
아이들에게는 시행착오를 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더 많이 실패하고, 더 자주 포기하고, 자신의 길이 무엇인지 더 많이 시도할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이 산이 아닌가 봐요, 싶으면 얼른 내려와서 또 다른 산을 찾아갈 수 있는 권리가 필요하다.
[네이버 책] 뭐라도 되겠지 - 김중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