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잡기-2024-034] 슬픔이 주는 기쁨 - 알랭 드 보통 - 별 셋 - 0624
15쪽
우리는 여라 가지 많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모두가 똑같이 "나"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외모에서 이런 분열과 가장 분명하게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사진사가 찍은 인물이 우리의 이름을 가진 존재와 어떤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동일시하고자 하는 분위기나 태도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다. 심리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 정신의 내부에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처럼 느껴지는 생각이나 기분이 공존하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어떤 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하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에서 다다르기는 힘들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이 담긴 엽서를 사서 책상 위의 눈에 잘 띄는 곳에 올려놓기도 한다. 그 그림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감정적 질감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견고한 상징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18쪽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에 정신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 ......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생각도 쉬워진다. 예를 들어 음악을 듣고 있을 때나, 눈으로 줄지어 늘어선 나무들을 쫓을 때. 우리의 정신에는 신경증적이고, 검열관 같고, 실용적인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의식에 뭔가 어려운 것이 떠오를 때면 모른 척하고, 또 기억이나 갈망이나 내성적이고 독창적인 관념들은 두려워하고 행정적이고 비인격적인 것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이나 풍경은 이런 부분이 잠시 한눈을 팔도록 유도한다.
19쪽
몇 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꿈을 꾸다 보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즉 우리에게 중요한 감정이나 관념들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가장 잘 만날 수 있는 곳이 반드시 집은 아니다. 가구들은 자기들이 불변한다는 이유로 우리도 변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가정적 환경은 우리를 일상생활 속의 나라는 인간, 본질적으로는 내가 아닐 수도 있는 인간에게 계속 묶어두려고 한다.
23쪽
오스카 와일드는 휘슬러가 안개를 그리기 전에는 런던에 안개가 없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안개야 많았겠지만, 우리의 시선을 인도해주는 휘슬러의 그림이 없었다면 그 독특한 특질을 보는 것이 약간 더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39쪽
상대를 향한 강렬한 욕망은 유혹에 필수적인 무관심에 방해가 된다.
56쪽
사랑받기 위한 거짓말에는 비뚤어진 가정이 수반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모든 개인적 (따라서 다른 사람과 다른) 특징들을 비워버려야만 상대의 사랑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다고 (따라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는 태도이다.
101쪽
그러나 어머니가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흔히 들려주는 말처럼, 따분해하는 사람은 주로 따분한 사람이다. ...... 나는 자신의 내부가 흥미로워 굳이 도시까지 "흥미롭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을 원했다. 정열의 샘에 늘 가까이 있어서 도시가 "재미"없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을 원했다. 인간 영혼의 어둡고 비극적인 면을 잘 알고 있어서 취리히 주말의 고요를 고맙게 생각할 사람을 원했다.
102쪽
도시의 공적인 공간이나 시설이 그 자체로 영광스러운 구경거리가 될 때에는 개인적 영광에 대한 야심도 어느 정도 줄어든다. 그냥 보통 시민이 되는 것이 괜찮은 운명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가장 큰 도시 취리히에서는 차를 소유하여 낯선 사람들과 함께 버스나 열차를 타는 일을 피하고 싶은 욕구가 로스앤젤레스나 런던만큼 강해지지 않는다. 이것은 취리히의 최고 수준의 전차 네트워크 덕분이다. 불과 몇 프랑이면 효율적이고 당당한 전차를 타고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안락함을 느끼며 도시를 가로지를 수 있으니 굳이 혼자서 여행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113쪽
보통 글로 쓴 이야기는 사건의 거죽만 훑고 지나간다. 석양을 본 뒤, 나중에 일기를 쓸 때는 뭔가 적당한 것을 더듬더듬 찾아보다가 그냥 "아름다웠다"고만 적는다.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글로 고정시킬 수가 없어 곧 잊고 만다. 우리는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붙들어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디에 갔고 무엇을 보았는지 목록을 작성한다. 그러나 다 적고 펜을 내려놓을 때면 우리가 묘사하지 못한 것, 덧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사라져버린 것이 하루의 진실의 열쇠를 쥐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115쪽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고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의 세계는 어떠한지를 돌아보게 된다. ...... 위대한 책의 가치는 ......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 이런 희미한, 그럼에도 치명적인 떨림을 포착하는 데에 모든 관심을 쏟는 책을 읽다 보면, 그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 뒤에도 작가가 우리와 함께 있다면 반응을 보였을 만한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새로 조율된 레이더처럼 의식을 떠다니는 어떤 대상들을 포착한다.
126쪽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는 방법,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다. ...... 만화가들의 밑바닥에 깔린 무의식적 목표는 유머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그런 식으로 조롱할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세상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네이버 책] 슬픔이 주는 기쁨 - 알랭 드 보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