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재능 - 나이와 긍지

 

향년(享年). 직역하면 '해를 누린다'는 뜻으로 한평생 살아 누린 나이,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살면서 보낸 시간 또는 세월을 누린 햇수를 뜻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처럼 고매한 향년이나 연륜보다 신동이나 천재아를 반긴다. 어린 아이가 어떤 기술이나 분야에 있어서 특출한 재능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은 물론 언론에서까지 아이의 재능을 칭찬하고 나선다. 반면 인생을 살면서 연륜을 쌓고 꾸준히 지혜와 덕을 갈고닦는 현인은 크게 주목 받지 못한다. 신동이 드물고 연륜이 깊은 사람이 흔해서는 결코 아니다. 나이만 먹었을 뿐 철딱서니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시대 어른들, 시간이 지날수록 편견과 선입견만 키운 중년 나부랭이들, 남의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독선적인 노인들이 수두룩하다. 성격 급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생후 몇 년 안에 비범하리만치 뛰어난 재능을 보이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 천재아들에게 박수를 보내느라 정작 돌봐야 할 자신의 연륜과 그 연륜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에는 영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이가 가진 천재성보다 세월을 통한 지성이 더 아름답고 감동적이란 사실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2013년 통계청이 발표한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81. 70년대보다는 20년이, 80년대보다는 15년이 늘었다. 지금이야말로 무엇이 더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지를 깨달아야 할 때다. 갈수록 평균수명은 길어지는데 사람들은 하나같이 뭐든지 더 일찍, 더 적은 나이에 이루거나 끝내고자 한다. 이른 나이에 성공하려 하고, 가능한 한 빨리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 어떻게 하면 하루빨리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지, 해당 분야에서 이름을 떨칠 수 있을지, 학위를 딸 수 있을지 고민하기 바쁘다. 어린 나이에 창업에 성공한 사람이나 최연소 영화 감독은 그야말로 부러움의 대상이다. 그리고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딱히 이뤄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다며 제 신세를 한탄하거나, 일부 소수 사람들의 얘기라며 발전 없는 스스로의 삶을 위로한다. 어리석고 안타깝기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당분간 평균수명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나는 현재 삼십대 중반. 아직 반도 안 살았다. 지금의 평균수명만으로도 45년이나 남은 데다가, 백 세 시대로 보면 앞으로 65년을 더 살아야 한다. 이제 막 진로를 바꾸고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았지만, 절대 늦은 게 아니다. 이 일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지금부터도 충분하다. '이 나이에 무슨...', '그러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지'라는 맥 빠진 생각에 지레 포기하고 단념하는 사람들에게 꼭 짚어 주고픈 대목이다. 평균수명만 늘었지 병원에서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태반 아니냐고 되묻는다면, 10년쯤 훅 깎아서 생각해 봐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10년을 침대에서 누워만 지내다 죽는다 해도 71. 난 이제 겨우 반밖에 살지 않은 셈이다. 정말 시작이다!

 

새해가 밝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한숨을 내뱉는다. 나이 먹는 것을 애석해하고 나이가 많은 것을 치분인 양 부끄러워하는 사람들. 약속을 한 건지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들 지껄이는 건지 죄 같은 소리다. 진짜 애석한 건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나이 먹는 것의 기쁨을 만끽해도 모자랄 시간에 한숨짓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을 수 있는 진리는 외면한 채 숫자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상의 이치 및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깨닫는 축복은 나이를 먹지 않고서는 애초에 불가능한, 연장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제아무리 빼어난 신동이라 한들 그 진리에 닿을 순 없는 법이다.

 

다루고자 하는 쟁점은 연령대가 높고 낮음이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 가는 과정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존대형이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말을 놓을 수 있는, 편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난다. 반대로 초면에 대뜸 말부터 놓고 보는, 거슬리는 양반들 꼴은 덜 볼 수 있다. 둘째 오롯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커지는 건 책임뿐만이 아니다. 내 인생에 대해서만큼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내가 추구하는 대로 삶을 이끌 수 있다. 대부분은 잊고 산다. 어린 시절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얼마나 안달했었는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다. 철모르던 시절의 얘기지만, 절실했던 그때를 떠올려 보면 적어도 내 인생의 주체라는 사실이 새삼 감사하게 여겨질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그 권리를 만끽하고 싶어질 것이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죽을 날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 때문에 슬프다고 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시한부를 괴롭히는 건 무엇보다도 죽을 날을 받아 놨다는 심적 고통이다. 시간이 충분치 않다는 생각해 조급하고 억울해진다.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시간에 대한 애석함을 갖는 건 스스로 시한부 인생을 자처하는 꼴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어느 날 갑자기, 자다가 조용히 떠나는 것도 복이라고. 설령 이루고자 하는 바를 다 이루지 못했더라도, 해 보지 못한 아까운 일들이 많을지라도 자기도 모르게, 고통 없이 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어떻게 생을 마감하게 될지 알 수 없다. 본인의 의지로 어쩔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오늘은 다르다. 사지가 멀쩡하고,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내 식대로 생각할 수 있다. 벌써부터 시한부 모양 흘러가는 시간을 애석해하고 죽을 날이 가까워 온다는 걸 한스럽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유일하게 동의할 수 있는 단점은 나이를 먹을수록 건강이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부분적인 동의일 뿐이다. 건강하다는 건 긍정적이고 편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병이 들거나 신체 기능이 떨어진다는 게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다. 불편할 순 있지만 건강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긍정적인 것들이 반드시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 다른 생각 - 모야모야>에서 개인사를 구구절절이, 구체적이고 실증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서는 니체의 지론을 짧게 덧붙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육체적 불구나 결함을 지닌 사람의 특정 기능이 정상인보다 크게 향상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 하나의 다른 기능이 결함 있는 기능을 보완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어떤 다른 기능에 대해서는 열악한 바보일 수밖에 없다.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가동된다면 천재성이 나타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도 예외는 아니다. 적도 지방이 태양열로 이상고온현상을 빚으면 북극의 빙하가 불어난다. 자연의 일개 결함이 빙하를 깨는 전혀 다른 기능으로 나타내는 예다."

 

외모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없겠지만, 나 역시 그들 대다수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외모의 절정기라 불리는 10~20. 이때 들을 수 있는 외모에 대한 칭찬은 고작해야 예쁘다, 귀엽다, 멋있다, 잘빠졌다, 잘생겼다, 싱그럽다 등이다. 그 나이대라면 누구나 풍기는 젊은 혈기 말고는 타고난 이목구비나 체형에 대한 평이 전부인 것이다. 이런 칭찬의 효과는 기대 이하다. 생각보다 빨리 잊혀지고, '행복'이란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도 민망할 만큼 단편적인 것들이다. 이유가 있다. 본인이 노력으로 일군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럴 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뿌듯함이나 흐뭇함이 쉽게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언젠가 한 배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진행자가 물었다. "잘생겼다는 말 이제 너무 많이 들어서 물리거나 지겹진 않으세요?" 대한민국 대표 미남 배우 중 하나인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니요. 여전히 들을 때마다 기분 좋은데요. 이상하게 그 얘긴 계속 들어도 계속 좋더라구요." 소위 '훈남', '훈녀'란 남들이 수시로 반복해서 칭찬해 주지 않으면 자부심도 가질 수 없고 기쁨도 느낄 수 없는, 참으로 수동적이고 한시적이라는 반증이다.

 

최고의 절정기를 넘기고서야 들을 수 있는 긍정적인 멘트는 전혀 다른 수준이다. 나이가 지긋해지면 지긋해질수록 그 농도는 진해진다. 일단 단순히 얼굴 생김새만을 이르지 않는다. 본래 타고난 외모에 그간의 연륜과 가치관이 더해져서, 겉모습에 대한 칭찬이란 곧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칭찬과도 같은 것이다. 고매하다, 고상하다, 우아하다, 품위 있다, 후덕하다, 중후하다, 인자하다 등이 그 예다. 이 같은 칭찬은, 그런 척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들어도 또 듣고 싶을 만큼 단편적이지 않다.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사람은 굳이 타인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린다거나 그렇게 보이고자 애를 쓰지도 않는다. 그 아우라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을 뿐더러, 실제로 수십 년 지혜와 덕을 가까이하지 않고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파릇파릇한 젊은이라고 해서 누구나 잘생기지 않은 것처럼 나이가 지긋하다고 해서 모두가 기품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점이 있다. 젊은 시절엔 우세한 유전자를 시기적절하게 타고나지 않으면 절대 외모에 대한 칭찬을 들을 수 없다. 하지만 중년 이후에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본인이 가진 인생관과 세계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살아온 그때까지의 삶이 곧 그 사람의 외모인 동시에 인격이 된다. 노력과 의지 여하에 달린 것이다. 철저한 자본주의사회에서도 돈으로 어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인격이 묻어나는 외양이다. 돈방석에 앉아서도 죽을상인 노인네가 있는가 하면 행색은 평범해도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미더운 어르신이 있다. 고약한 인상의 어르신을 보면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절대 저렇게 늙진 말아야지!'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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