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섭리교 - 나르시시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과 만물이 움직이는 법칙은 다름 아닌 우주의 섭리에 따른다는 것, 이 두 가지만 기억하면 타고난 배경이나 현재의 여건을 탓하며 지레 삶을 포기하는 비극도 막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운명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정해진 운명이란 게 정말 있는 건 아닌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보곤 한다. 단언컨대 운명에 대한 믿음이나 기대는 결코 행복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본인이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을 때 그럴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이유도, 기뻐할 여지도 없어진다. 본래부터 정해져 있던 당연한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불미스러운 일을 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예정된 불상사라 생각하면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대책을 마련해도 소용 없다는 생각에, 위험을 방치하는 무책임한 태도를 취하거나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게 된다. 운명 운운하는 사람들에게서 행복을 추구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모습,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가진 만큼 베풀려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섭리에 대한 믿음은 철저하게 원인에 따른 결과, 즉 인과관계에 무게를 두고 있다. 모든 일은 백만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한 개인이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도 모두 다양한 결과물의 또 다른 결과물이 원인으로 작용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해석이다. 그 원인은 한참이 지난 고릿적 과거사부터 그 일을 겪을 당시의 순간적인 판단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게 널려 있다. 중요한 건 지난날 본인의 행각이든 다른 사람이나 자연현상에 의한 과거지사든 이미 벌어진 일들이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순간 본인의 행동에 대한 결정권만큼은 스스로 쥐고 있다는 사실이다. 본인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 어떤 말을 내뱉고 어떤 생각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때문에 순간순간 내리는 사소한 결정에도 책임감을 가지고 진중하게 임할 수밖에 없다.

 

본인이 어쩌지 못하는 것, 이미 결정된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을 두지 않는 게 상책이다. 백 번 다른 사람이나 사회를 탓하고 자책하며 스스로 발등을 찍어 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 그 순간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데 힘을 쏟는 게 현명한 처사다. 사안이 중대하면 중대할수록, 그 파장이 크면 클수록 다각도로 상황을 참작하고 가능성을 헤아려야 한다. 당시 신중을 기해 내린 결정은 이후의 행복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 선택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성을 미리 파악하고, 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을 일종의 값 지불로써 사전에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의 행복에 보탬이 되는 계기를 마련해 두는 셈이다.

 

선택은 당연히 주체적이어야 한다. 순전히 본인의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일 때라야 원망의 싹을 애초에 뿌리 뽑을 수 있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편이 낫다. 이유는 두 가지다. 더 생산적이고 비교적 빨리 벗어 날 수 있다는 것. 자책은 단순히 후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반성으로 이어지고 개선으로 발전한다. 때문에 생산적이다. 누군가를 극도로 미워해 본 사람들은 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그 기분 나쁜 감정은 쉽게 가시지도 않는다. 억울하고 분해서 두고두고 내 일상을 망쳐 놓기 일쑤다. 이는 더 큰 원망으로 뻗치고 만다. 모든 게 그 사람 탓인 것만 같은 피해 의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아주 고약한 기운이다. 주체적, 적극적인 결정들로 본인의 인생을 꾸려 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라고 해도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할 순 없다. 설령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도 단점이나 부작용이 전혀 없을 수도 없다. 그게 인생이고, 그래서 더 맛깔나는 인생이다. 완벽한 결정을 내려야 제맛이 아니라,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각기 다른 장단점이 있고 본인이 좀 더 만족할 만한 결정을 내리는 자체에서 흥미를 만끽하는 것이 인생의 묘미인 것이다. 죽기 전 어느 날, '돌아보니 참 행복한 인생이었다'고 회고하는 것보다 하루하루 과정을 제대로 즐기는 것, '지금 참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다. 앞뒤 상황을 헤아려 고민 끝에 무언가를 선택하고 그 선택이 훗날에 미치는 영향을 조마조마하며 지켜보는 스릴은 인생의 숨은 재미이기도 하다. 완벽한 선택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한탄하는 건 지양할 일이다. 완벽한 결정이란 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불가능한 일에 마음 쓰고 있는 건 시간 낭비일 뿐이다. 선택권이 다름 아닌 본인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뻐하기도 시간이 모자랄 판이다. 행복은 스릴을 만끽하고 결정권을 누리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 스며 있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판이하게 달라지는 인생. 덕분에 아슬아슬한 긴장감,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주도권과 더불어 곳곳에 숨어 있는 역전과 반전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역전과 반전은 얼마든지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증거다. 따라서 아무리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해도 인생 전체를 포기하거나 행복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을 필요가 없다. 전후 사정을 면밀히 파악하고 최선의 선택을 해도 생각지 못한 복병을 만날 수 있듯이, 후회스러운 선택을 한 경우에도 뜻하지 않은 긍정적인 결과물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완벽하지 않다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이다.

 

대학에서 1년은 건축을, 2년 반은 의류학을 전공했다. 실내 인테리어를 업으로 삼을 요량으로 건축과를 선택했지만, 건축과 수업은 역학 등의 물리학과 정교함을 요하는 설계 도면 작업이 주였다. 참 바보 같은 선택이었던 것이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선택한 학교, 학과였기에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잘못된 선택임을 깨닫고 그저 조용히 편입을 준비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학교 수준을 많이 높일 순 없었지만 어차피 다니던 학교에 원하는 의류나 의상학과가 없어서 전과 대신 편입을 결정한 터라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잠자코 입학했다. 편입이 아닌 대입 시험 성적으로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학교였다.

 

잠깐 동안은 왜 처음부터 이 학교, 이 학과를 지원하지 않았나 후회스러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잘된 일임을 깨달았다. 건축과와 의류과는 디자인이란 점에서 유사하긴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건축은 공과대학으로 90%가 남자, 의류는 생활과학대학으로 90%가 여자다. 먹고 마시고 함께 밤을 지새는 날이 많은 곳과 완벽하게 세팅한 차림으로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각자 집으로 향하는 곳. 수업은 의류가 나았지만 분위기는 건축 쪽이 내 타입이었다. 전 학교에서 1, 다음 학교에선 2년 반을 있었지만, 마음 맞는 친구들은 1년간 만난 놈들이 대부분이다. 현재 가장 가깝게 지내는 두 녀석도 그 학교를 가지 않았다면, 그때 그 '후회스러운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못 만났을 놈들이다. 잘못된 선택 덕분에 좋은 친구를 둘이나 얻게 된 것이다. 그 선택은 착각에서 비롯된 명백한 실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다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똑같은 결정을 내릴 만큼 한 치의 후회도 남지 않는, 참 다행스러운 결정이었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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