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버라이어티 - 이해와 인정

 

정치, 경제 분야에 까막눈이면서도 언론이 고발하는 각종 사회적 현안에는 나도 모르게 귀를 기울이곤 한다. 분야 자체가 흥미로워서는 아니다. 비주류, 소수자, 약자의 입장과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다. 그런데 개인의 다양한 생각을 가까운 지인들과 공유하던 과거와는 달리, 최근에는 인터넷과 SNS를 통해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들 간에도 의견을 주고받는 일이 흔해졌다. 한 인터넷 기사에 개인의 생각을 댓글로 남기면, 그 댓글에 대해 지지 또는 비판하는 글이 연이어 달리면서 토론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댓글이 한계 수위를 모르고 갈수록 격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짤막한 글에 확실한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같은 주제로 지인들과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의견을 나누면, 오해할 만한 단어는 바로잡고 설명을 덧붙여 본인의 뜻을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댓글의 경우는 다르다. 해명 내지는 정정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말투까지 생판 다르기 때문에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 오해는 한도 끝도 없이 불어난다. 악의적이고 무책임한 댓글로 비생산적인 감정싸움만 반복하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난잡한 댓글 문화는 입장의 '차이'보다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경험한 바가 다르고 생각하는 기준, 속해 있는 집단이 다르면 당연히 입장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같은 조직은 물론이거니와 한 식구끼리도 입장이 엇갈리는 판에,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본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리라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희망이다. 내가 느끼는 댓글의 매력은 따로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지인 또는 또래에게서는 결코 들어 보지 못한 의견, 개인적이지만 참신한 입장을 접할 때면 댓글의 긍정적인 기능을 깨닫게 된다. 물론 모든 의견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납득할 만한 기준이나 본인의 경험을 근거로 들지 않으면 선뜻 이해되지 않는 입장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여건을 일일이 밝히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해, 맞불 작전으로 똑같이 강하게 되받는다거나 감정적인 비난의 글을 남기진 않는다. 그럴 만한 개인적인 사정이 있겠지 하고 생각할 뿐이다. 이해할 순 없지만 그런 의견도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이해와 인정은 종종 뒤섞여 쓰이지만, 그 의미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이해는 상대의 감정이나 생각에 공감하고 수긍하는 것이고, 인정은 겪어 보지 않은 데다가 짐작조차 되지 않아 공감할 순 없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상대의 입장을 존중하는 것이다. 어떤 의견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을 이해, 부정적인 반응을 무시라고 한다면, 인정은 그 중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해할 수도 없지만 무시하지도 않는, 반대 입장이지만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는, 그저 각기 다른 개인의 입장일 뿐이며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 우리나라 네티즌들이 반드시 귀담아들어야 하는, 그것이 인정이라는 기특한 녀석이다.

 

얼마 전 국회의원이 소유한 부동산을 두고 투기냐 투자냐가 도마 위에 오른 적이 있다. 관련 글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한 블로거의 의견을 접할 수 있었다. 개인이 소유한 땅을 걸고넘어지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며, 해당 프로그램의 제작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처음에는 이런 의견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호기심에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방송의 핵심을 잘못 짚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이었지만, 내가 파악한 제작진의 의도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는 걸 알릴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로 다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그 차이를 좁혀 보자는 훈훈한 생각에서 시작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나는 먼저 그가 현재 부동산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 대학에서의 전공 분야 덕에 선동적 미디어의 폐해를 익히 알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와 같은 의견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 뒤 개인적인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말머리에서부터 내 의견을 몰지각한 발언으로 매도해 버렸다. 몰라서 하는 얘기다, 본인이 국회의원 입장이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겠냐며 내 의견을 묵살하고 나섰다.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구성원이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 좀 더 생산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시작했던 논쟁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나름의 전문적인 지식으로 내 생각을 뜯어고치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아예 대화를 회피해 버렸다.

 

부동산으로 재산을 불린 국회의원을 두둔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오히려 내 생각이 타당한지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하는 긍정적인 기회가 된다. 진심으로 안타까운 건 많은 사람들이 ''처럼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개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다. 본인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다수의 의견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을 무시하고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는 태도는 사회적인 조화나 개인적인 행복에 하등 이로울 게 없다.

 

 

우리 부부의 경우, 그와 나는 극과 극으로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경우보다는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관계에는 이해보다 인정의 여부가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서로를 얼마만큼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인정하기만 하면, 이해하지 못해도 관계가 틀어질 일이 없다. 어떤 의견에 대해서도 서로 잘못됐다거나 틀렸다고 지적하지 않는다. 당연히 감정이 상할 일도 없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잣대로 상황을 판단하는 건 신기하고 놀라운 그의 재능이다. 똑같은 질문을 듣고도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는 건 각자의 매력이자 재주다. 굳이 나와 일치시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일상의 잔재미만 뭉개는 꼴이다.

 

결혼 초기, 경제적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은 적이 있다. 그런데 함께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강구해도 모자랄 판국에, 한창 걱정 섞인 말들을 주고받다 조용해서 돌아보니 그가 잠이 들어 버린 게 아닌가! 기가 막혔다. 어떻게 그 심각한 상황에서 잠을 잘 수 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는 곧 원망이 일었다. 그는 전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나만 애를 태우고 있구나 싶어 답답하고 분했다. 서운한 게 있으면 바로바로 짚고 넘어가야 뒤탈이 없다. 잠에서 깬 그에게 물었다. "걱정이 안 돼? 나만 수선 떠는 거야?" 나로선 당연한 질문이었지만 그는 당황스러워했다. 그의 입장은 이랬다. 해결책을 찾든 스트레스를 풀든, 눈을 감고 차분히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게 그가 고민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해명을 들은 이후에는 같이 고민하다 그가 코를 골아도 전혀 서운하거나 답답하지 않다. 사실 안절부절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나나, 잠들어 버린 그나 결과적으로 마땅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돈 문제를 비롯한 대부분의 가정사는 분명한 해결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다르게 보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한 사람이라도 잠시나마 눈을 붙이고 일어나 새로운 마음으로 문제에 다시 접근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런 그가 긍정적인 수준을 넘어 이상적으로 보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각한 사안을 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몇 초 만에 코를 고는 모습이란, 꼭 시트콤에서 튀어나온 코믹한 캐릭터 같다. 혼자 시트콤을 감상하며 피식대고 있으면 그는 정색하고 말한다. "절대 자는 거 아니야. 눈만 감고 있을 뿐이야." 그의 능청스런 유머에 고민이고 뭐고 일단은 웃고 본다.

 

그만의 고민 방식, 잠들기.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다. 걱정거리가 있을 땐 눈을 감고 있는 것조차 내겐 고역이다. 고민 중에 잠이 드는 건 경험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그를 이해한다고 말하는 건 순전히 착각 또는 거짓말에 불과하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의 방식을 틀렸다고, 잘못된 거라고 비난하진 않는다. 개인마다 대책을 강구하는 방식,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식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아니, 다른 게 당연하다. 본인과 똑같은 방식을 요구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기 때문에, 그 자체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의 방식을 인정하면, 덩달아 나는 나대로 나만의 방식을 고수할 수 있다. 인정은 상대방을 존중함으로써 본인까지 존중 받을 수 있는, 바람직한 관계의 기본 조건이다. 단 상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만 용납돼야 한다. 폭력이나 폭언을 퍼붓는다거나 상대방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무언가를 같이 하자고 요구하는 경우, 혹은 자해를 일삼는 경우에는 다른 방식이 아닌 틀린 방식일 뿐이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상대방의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편은 웬만해선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 누군가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화를 내는 일은 있어도, 말다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유는 하나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때 왜 그랬냐며 누군가가 다그치기 시작하면, 그는 바로 잘못을 시인한다.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핑계를 찾거나 어영부영 둘러대지 않는다. 그러면 대부분은 언성을 높였다가도 이내 흥분을 가라앉히고 더 이상 그를 나무라지 않는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어설픈 사과보다 진심 어린 인정(認定)이 반드시 필요하다. 말로 표현할지 말지는 관계나 상황에 따라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만, 잘못을 인정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건 기본적인 도리다.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누군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보다 그가 상대방의 무리한 이해를 요구하거나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할 때, 서로가 상대의 탓으로 돌릴 때 주로 발생한다. 과거 상대의 같은 잘못을 들먹이며 본인의 잘못을 무마하려는 시도 또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과 상대의 잘잘못을 저울질하기 전에 일단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문제에 접근하면 분명 분쟁의 반 이상은 줄일 수 있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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