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콤비 - 두 개의 구슬 - 차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 우린 각자 움직인다. 바구니를 하나씩 집어 들고 각자가 필요한 걸 따로 고르는 것이다. 하루는 서로의 바구니를 보고 기똥차다 싶었다. 서로의 역할과 취향이 한눈에 봐도 확연히 달라서다. , 호박, 순두부, 칼국수 면, 바지락은 그가, 소주, 막걸리, 라면, 컵라면, 계란, 식용유, 콜라는 내가 골랐다. 그가 끼니를 때우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챙겼다면, 나는 늘상 갖춰 놓는 것에 술밖에 안 챙긴 것이다. 물론 목록 따윈 없었다. 각자가 알아서 원하는 대로 골랐는데, 고르고 보니 완전히 다른 것들만 집어 왔다.

 

이럴 때 달라서 참 좋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이상하게 보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그저 신기하고 재밌을 뿐이다. 해가 될 게 전혀 없는데 시비를 걸 필요는 없다. 본인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본인과 다른 상대는 비정상이 되지만, 모든 사람은 다르기 마련이라고 생각하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오히려 다르기 때문에 음양의 조화처럼 부족한 부분을 메꿀 수 있으니 잘된 일이다. 혼자 볼 땐 미처 생각지 못한 것까지 필요한 걸 전부 챙길 수 있는 데다가, 다를수록 겹치는 게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지독하게 별난 사람이 아닌 이상 한국 사람은 대부분 식성이 다 거기서 거기다. 햄버거, 피자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밥을 아예 안 먹고 살진 않는다. 반대로 평소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더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은 햄버거, 피자가 당길 때가 있다. 지나치게 싱겁거나 짜게 먹지 않는 한, 간도 웬만한 수준에서 합의를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식성은 부부, 연인 간의 잦은 충돌 요인이 된다.

 

우리 부부야말로 식성이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외식을 할 때나 집밥을 먹을 때나 다른 식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인정하고 있어서다. 각자 제 입맛에 맞게 맛있게 먹자는 것. 집에서 먹을 땐 당연히 문제가 없다. 짜거나 매우면 조금씩 먹으면 되고, 싱거우면 소금이나 간장을 더 넣어 먹으면 된다. 건강에 안 좋다며 싱겁게 먹으라고 강요하는 법은 없다. 싱겁게 먹는 것보다 맛있고 즐겁게 먹는 게 더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서다.

 

외식을 할 땐 먼저 메인 메뉴를 정한다. 다투지 않고 둘 다 만족할 만한 식당을 고르기 위해서, 우린 일단 각자 두세 가지씩을 떠올린다. 고깃집, 횟집, 족발집, 감자탕집 등등. 대부분은 그중에 일치하는 메뉴가 있다. '삼겹살 먹고 싶지 않아?' 같은 유도식 질문 따윈 하지 않는다. 장난이면 모를까, 본인이 먹고 싶은 걸 상대에게 은근히 찔러보는 능구렁이짓은 영 우리 취향이 아니다.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각자의 뜻을 솔직하고 분명하게 밝힌다. 조르거나 강요하지도 않는다. 내가 가장 먹고 싶은 걸 억지로 끌고 가 먹는 것보다, 차선 메뉴를 웃는 얼굴로 먹는 게 훨씬 낫다. 다른 식성은 식당에 간 뒤에 확연히 눈에 띈다. 둘 다 좋아하는 메인 메뉴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개의 반찬을 네 것, 내 것으로 가르기 시작한다. 각자 자기가 잘 먹는 걸 자기 앞으로 끌어다 놓는다. , 옥수수, 감자는 그, 버섯, 나물, 김치는 내 차지다. 집어 먹는 반찬이 서로 다르다는 걸 알고 재미 삼아 시작한 것이, 이젠 식당에서 반찬이 나오면 으레 하는 일종의 절차가 돼 버렸다. 회는 내가 더 좋아하지만 그도 아예 안 먹는 건 아니니 문제 될 게 없고, 횟집에 가서는 각자가 좋아하는 반찬을 바로 앞에 두고 먹을 수 있으니 편해서 좋다. 다 다른 식성 덕분이다.

 

같은 영역에 대해 강점을 가진 사람이 약점을 가진 사람을 보면,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신기하다는 것이다. 이후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무능하게 여기는 사람과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 어느 쪽이든 본인 마음이지만, 행복한 쪽은 분명 흥미롭게 여기는 사람이다. 당연히 나는 후자를 택했다. 덕분에 남편의 일화를 들으며 신선한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나와는 다른 성향이 유머를 유발하는 핵심이다. 물론 나만 웃는다. 그에겐 그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초등학교 점심시간이다. 여느 때처럼 도시락을 꺼내서 먹고 있는데, 한 아이가 자기 도시락이 없어졌다며 옆에서 시끄럽게 울어 댄다. 가만 보니 옆에 도시락이 하나 더 있다. 아차 싶다. 보이기에 아무 생각 없이 꺼내 먹었는데, 자기 도시락을 두고 딴 아이 도시락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는다. 하루쯤 바꿔 먹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유난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도시락을 내민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생각이다. 당시 도시락 통들이 너무 비슷하게 생겨서 지금도 그럴지도 모른다며, 충분히 헷갈릴 만했다며 너스레를 떤다.

 

역시 초등학교 때 일이다. 학교 소풍 날. 일정이 끝나고 다들 엄마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데, 그가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을 따라가고 있더란다. 결국 어머님 따로, 그 따로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 이 얘기가 진정 실화란다.

 

그는 누구의 이야기든 경청한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회사 흡연구역에서 마주치는, 얼굴만 아는 정도의 주책맞은 누군가가 남편을 붙잡고 느닷없이 본인의 여자친구 얘기를 늘어놓는다. 그래도 그는 싫은 내색 하나 없이 그 얘길 다 들어 준다. 주책맞은 사람들은 대부분 눈치가 없다. 당연히 겉으로만 열심히 듣는다는 걸 절대 눈치채지 못한다. 길 위의 사이비 종교인을 만났을 때, 남편은 듣기의 대가로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도를 아십니까?'로 시작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한참을 걸어 가며 들어 준다. 오히려 안면이 있는 흡연구역 누군가의 이야기보다 더 귀기울여 듣는다. 중간중간 반론도 제기한다. 그들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신성한 충격이다. 덧붙이는 말이 더 압권이다. "그들의 얘기도 들어 주는 누군가가 있어야 하잖아?"

 

평소 우린 각자의 방식대로 말하고 대답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나는 논리를, 그는 좋은 분위기를 추구한다. 각자가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고 존중한다. 그가 나처럼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한 사람이나마 조화롭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우리 둘의 대화가 유쾌하고 훈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말을 잘 못한다. 문장 완성이 어려운가 보다. 서술어는 내가 거든다. 그럼 그는 복창한다. '그래, 내가 하려던 말이 바로 그거야!'라는 뉘앙스다. 때때로, 시간이 갈수록 더 자주, 나는 말 못하는 그가 웃기다. 신기하고 매력적이다. 그는 그걸 보고 웃는 내가 밉지 않단다. 기분이 나쁘기는 커녕 같이 즐겁단다. 오히려 적절한 단어를 골라 줘서 고맙단다. 답답했던 속이 다 시원하단다. 비웃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사랑스러워 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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