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개똥철학 - 쏘리와 땡큐

 

우리말은 미묘한 차이를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잘 알려져 있다. 그 예로 흔히 색을 표현하는 단어가 꼽힌다. 푸르스름하다, 거무튀튀하다, 발그레하다 등이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정교한 언어는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해서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사물이나 감정을 묘사할 때는 좀 더 생생하고 실감 나게 표현할 수 있다. 반면에 그 미묘한 차이 때문에 상대방의 오해를 불러일으켜 기분을 망쳐 버리기도 한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미안하다'는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 뒤에는 보통 두 가지 대답이 이어진다. '괜찮아' 혹은 '미안하다면 다야?'. 후자의 경우, 말 그대로 '미안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소용없다는 얘기다. 평소 내가 미안하다는 말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좁은 소견으로나마 비교해 보면 영어는 우리말에 비해 상당히 포괄적이다. '미안하다'에 해당하는 'sorry'도 마찬가지다. 'sorry'가 쓰이는 상황을 살펴보면 우리말의 여러 가지 의미가 한 단어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감정과 관련해 'sorry'가 쓰이는 다섯 가지 경우를 구체적인 상황에 대입해 봤다.

 

 상대방을 거슬리게 하는 일을 벌였을 때

 "늦어서 미안하다", "나 때문에 다친 것 같아 미안하게 생각한다."

 상대가 꺼릴 만한 얘기를 하고자 할 때

 "미안하지만 먼저 일어나야겠다.", "죄송하지만 영업 (시간)이 끝났습니다."

 본인의 유감, 슬픔, 실망감, 애석함, 안타까움 등을 표현할 때

 "그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아프다."

 유감, 슬픔, 실망감, 애석함, 안타까움 등을 느끼는 상대방에게 본인의 동정심이나 슬픔을 전할 때

 "네가 억울하게 당하는 걸 보니 나도 너무 안타깝다."

 좌절감에 빠져 있거나 상황을 비관하는 누군가에 대해 얘기할 때

  "회사에서 해고된 뒤로 그는 자괴감에 빠져 집 밖을 나서지도 않는다."

 

굳이 영영사전을 들춰 가면서까지 'sorry'라는 단어에 목매는 이유는 '미안하다'는 말이 얼마나 부질없는 말인지를 밝히고 싶어서다. 이제부터 내가 왜 평소 '미안하다'는 말에 대해 회의적인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미안하다면 다야?', '미안할 짓을 왜 해?', '미안하면 그러질 말았어야지!'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렇다면 새겨듣도록!

 

위의 다섯 가지 상황 중에 'sorry'를 우리말로 옮길 때 '미안하다'로 해석되는 경우는 단 10%에 불과하다. 통상 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발하곤 하지만, 20%가 아닌 10%에만 써도 충분하다. ①, ②는 이미 벌어진 일과 앞으로 꺼낼 얘기라는 시점의 차이만 있을 뿐 상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하는) 데 대한 사과라는 점에서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①, ②를 하나로 묶으면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한 경우는 두 가지로 추려진다. 하나는 상대방이 꺼릴 만한 일을 이미 했거나 하려고 할 때, 또 하나는 예의를 차려야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닐 때다.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자. 상대방이 꺼릴 만한 일을 했거나 하려고 할 때란 길이 막혀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말하다 침을 튀겼을 때, 깜짝 선물을 위해 연인을 속였을 때, 상대의 말을 도중에 끊을 때, 준비한 음식이 실패작일 때 등이다. 버스에서 옆 사람의 발을 밟았을 때, 고객이 찾는 물건이 없을 때, 남의 차를 들이받았을 때, 영화 상영 중 극장에 입장할 때,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 때 등이 예의를 차려야 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닌 경우에 속한다.

 

미안하다는 말이 언제 필요한지를 생각해 보면 언제 쓰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쓰지 말아야 할 때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이유는 '폐를 끼친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기 때문이다. 치명적인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했다면, 작정하고 사기를 쳤다거나 배우자 몰래 바람을 피웠다면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상대의 화만 돋울 뿐이다. 저지른 잘못에 비해 너무 가벼운 말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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