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생각 - 섭리교 - 비극과 참극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2010년에 가정을 꾸려 그야말로 평범하게 살고 있다. 세 살 된 딸, 맞벌이 부부, 은행 대출, 아파트 장만까지. 우리나라 중산층의 대표적인 모습이다.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걱정거리 하나 없는 집이 어디 있겠냐마는, 그만하면 누가 봐도 그럭저럭 살아 가는 평범한 집안이다. 그런데 작년에 이어 올해까지, 두 번씩이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 왔다. 첫딸 이후 벌써 두 번째 유산 소식이다.

 

잠결에 전화를 받았다. 친정이었다. 아빠는 다짜고짜 이제 애 좀 낳아야 되는 거 아니냐며 서른 중반인 내 나이를 들먹였다. 동생과 동갑인 올케 얘길 꺼내면서 더 늦기 전에 아이를 가지라는 얘기였다. 내 생각은 개인사가 아닌 '하늘의 뜻'에 미쳤다. 아빠 얘길 듣고 뱉은 말은 '역시 하늘은 공평해'였다. 대뜸 핀잔이 날아왔다. 시누이란 사람이 그게 할 소리냐는 것.

 

물론 나는 기본적으로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자기 자신의 강점과 다른 사람, 세상사가 지닌 좋은 점을 볼 수만 있다면 열이면 열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 동생네 부부도 당연히 행복하기를 바란다. 특히나 올케의 행복을 바란다. 여기서나 올케라고 썼지, 사실 그녀를 올케라고 불러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동생은 내가 주선한 소개팅으로 결혼에 골인했다. 우린 시누올케 이전에 친구였다. 설마 결혼까지 할 줄은 모르고 가벼운 마음으로 주선한 소개팅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둘은 결혼했고, 둘의 첫 만남을 주선한 장본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둘의 행복을 간절히 바란다.

 

경험자는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 어설프게나마 짐작은 하고 있다. 유산으로 인한 상실감이 어느 정도인지. 내 친구이자 올케가 그런 아픔을 두 번씩이나 겪었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늘이 공평하다는 발언은 쌤통이라거나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놀부 심보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평소의 지론이 튀어나왔을 뿐이다. 처음 동생네 소식을 들은 건 며칠 전 남편으로부터다. 무뚝뚝한 딸보다 살가운 사위를 더 좋아라 하는 친정 모친의 전화가 그에게 갔다. 두 번째이기 때문에 충격과 안타까움은 더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태어난 아기를 잃는 것 못지 않게 유산 역시 큰 상처가 된다는 무시무시한 얘기만 머릿속을 빙빙 돌았다.

 

가진 것도 쥐뿔 없는 우리 부부는 감정이 풍부한 건지 어디가 모자라는 건지 주변 사람들을 걱정하기 바쁘다. '안됐다'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는다. 부모의 이혼으로 마땅히 거처가 없는 친구에겐 집이라도 사 주거나 우리집에 와 같이 살자고 하고 싶고, 맘 착한 백수에겐 회사를 차려 그들을 위한 일터를 마련해 주고 싶다. 보증금 500에 월세 30짜리 집에 살면서 참 별소릴 다 한다. 남편과 이 모 군, 박 모 양 걱정에 한창 한숨을 내쉬다 보면 문득 생각난다. ', 우리가 누굴 도와줄 형편은 아니구나! 누가 누굴 걱정하고 있는 거지?' 동생네 일도 그랬다. 안타까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지만, 그들의 사연에 가슴 아파하던 중 '그래도 잘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유산이란 분명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떤 말로도 위로할 수 없을 만큼 안타까운 일이다. 다만 한 발짝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섭리에 대한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인생을 비관하고 좌절하는 이유는 잃은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당시의 괴로움이 너무 커서 가진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남편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하나를 잃었을 때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를 떠올린다. 그러면 하나를 잃어 속상하긴 하지만 다행이란 생각, 감사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치민다. 하나를 얻었을 때는? 당연하다며 자만하지 않는다. '럭키한 녀석들'이라며 진심으로 감사히 여긴다. 더 바람직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상대적 빈곤감은 행복을 느끼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 누구는 학벌, 재산 모든 게 완벽한데 나는 왜 이 모양이냐는 신세 한탄만 부른다. 섭리에 대한 확고한 신념만 있다면 상대적 빈곤감의 헛된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아픈 기억, 고된 오늘은 꿈 같은 내일에 대한 일종의 예고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아픔 역시 내가 모르고 있을 뿐 현재진행형일지 모른다. 여태껏 누리던 것들을 한순간에 잃을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이 같은 짐작은 기똥차게 맞아떨어진다. 하늘은 공평하고 우주의 섭리란 완벽한 것이니까. 어떤 식으로든 하늘은 플러스마이너스의 균형을 귀신같이 지키니까.

 

착각은 자유라지만, 동생네가 지금까지 큰 문제 없이 지내왔다고 해서 그 끔찍한 유산 경험이 예고된 것이었거나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로 오해하는 방종한 이들은 없기를 바란다. 핵심은 플러스와 마이너스, 즉 상황상 좋은 일과 나쁜 일, 재능상 강점과 약점은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차를 두고라도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다. 나쁜 일을 액땜이라고 생각하거나 더 나쁘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기면 괴로움 대신 감사를 느낄 수 있다. 아기를 잃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랬다면 더 괴로운 일을 겪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비극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건 그것이 참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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