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인간, 그리고 자연

 

<캐스트 어웨이>의 각본은 윌리엄 브로일리스 주니어(William Broyles Jr.), 감독은 로버트 저메키스(Rpbert Zemeckis)가 맡았다. 기똥찬 심리 묘사로 기억에 남는 두 거장의 작품이 있다. 브로일리스의 <언페이스풀>(2002), 저메키스의 <플라이트>(2012).

 

인간의 도구, 도구의 인간

 

바쁜 일정을 마치고 출장에서 돌아온 척. 그는 먼저 켈리를 찾는다. 켈리는 반가운 마음에 키스와 포옹으로 척을 맞는다. 재회는 켈리의 사무실 내 복사기 앞에서 이뤄졌다. 둘은 한창 복사 중인 기계의 소음에 맞춰 가볍게 몸을 흔든다. 일정하게 반복되는 기계음. 리듬처럼 느껴지는 복사기 소리에 따라 춤을 추는 연인. 사랑하기 때문에 기계음마저 음악같이 들린다고 하기엔 왠지 안타까움이 스민다. 인간이 그 좋다는 머리로 만들어 낸 기계. 기계는 우리 삶에 필요 이상으로 깊숙이 들어와 있다.

척은 차 키에 '다용도(맥가이버) '을 달아 두었다. 말 그대로 여러 용도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편리한 도구다. 그를 무인도에 떨어뜨릴 항공기에 오르기 전, 그 요물은 차 키에 딸려 척의 손에서 켈리의 손으로 넘어간다. 조난 당한 척이 가진 도구는 아무것도 없다. 안타까움은 배가 된다. 나도 맥가이버를 가지고 있다. 그 쓸모도 익히 알고 있다. 그런데 척이 그랬듯, 얄궂게도 정작 필요한 순간엔 맥가이버가 보이지 않는다. 돌로도 쪼개기 힘든 야자와 씨름하던 척. 얼마나 후회막급이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작은 소품까지도 하나의 주제를 향한 작품. 작가(감독)의 섬세함이란 이런 게 아닐까.

 

홀로 섬에 표류한 척은 혹시 있을지 모를 원주민을 애타게 불러도 보고, 구조 요청 메시지를 모래 위에 커다랗게 새겨도 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스스로 살아남을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멀리서나마 배의 불빛을 발견하고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섬을 떠나 바다로 나갔다 도로 떠밀려 온 허사를 한 차례 치르고 난 뒤에야 깨달은 바다.

 

떠밀려 오는 배송 상자들. 척은 반드시 고객에게 전달하겠다는 책임감으로, 보이는 박스마다 일일이 주워다 놓는다. 바람에 날아갈까, 폭우에 찢길까, 애지중지 지킨다. 배송 업체 직원으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덕분에 척은 훌륭한 도구를 만들어 쓸 수 있게 된다. 직업 정신을 발휘해 배송 상자들을 모으던 척은, 부상과 기아로 생존의 위협이 코앞에 닥치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상자 속 물건들을 확인한다.

 

비디오 테이프, 배구공, 서류 뭉치, 스케이트, 호피 망사 원피스. 그 자체로는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새로운 도구를 만드는 데는 더없는 재료가 된다. 얼마간의 섬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척은 살아남는 데 필수적인 도구들을 제작한다. 비디오 테이프는 튼튼한 끈으로, 망사는 고기잡이 그물로, 스케이트 날은 칼 대용으로. 어느 하나 버릴 게 없다. 상자 속 물건들뿐 아니라, 파도에 떠밀려 온 하나하나가 유용한 도구이자 부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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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의 일부로 보이는 철판이 파도에 쓸려 온다. 모래사장에 세워 두고 어디에 써먹을지 머리를 굴리던 중 판이 바다쪽으로 쓰러진다. 순간 바람의 방향을 감지한 척. 바다로 나갈 준비를 시작한다. 통나무를 베고, 필요한 개수만큼 나뭇가지 껍질로 밧줄을 엮는다. 날짜를 계산해 바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적기를 추정, 계획한다.

 

같은 시간, 다른 가치

 

한창 경제 발전으로 나라 전체가 분주하던 지난 50년 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고들 했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걸 성공의 기본 조건으로 여겼다. 최근에는 조금 누그러진 듯하지만, 여전히 그 인식은 남아 있다. 무리(無理)에는 항상 부작용이 따른다. 척은 누구보다도 알차게 시간을 활용했지만, 결국 4년이란 시간을 송두리째 날려 버렸다.

 

'페덱스'의 모토는 '빠른 배송 서비스'. 업무상 일각을 다투다 보니 척은 일상에서도 여유를 찾기 어렵다. 사실 척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다.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하려면 여유를 부릴 틈이 없다. 정작 꼭 필요한 일마저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미루기가 일쑤다. 척은 치과 진료를 내내 미뤄 왔다. 지금 생각하면 뭐가 그리 바빠서 치과 갈 짬도 못 냈었나 싶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마 더 크게 공감할 것이다. 결국 바쁘다는 핑계로 제때 해결하지 못한 문제 탓에, 척은 무인도에서 이에 스케이트를 대고 돌로 내리쳐 충치를 빼내는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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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주인공을 배송직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캐스트 어웨이>는 모험·드라마보다 휴먼·드라마에 더 가까워 보인다. 모험 과정상의 재밋거리보다 인간과 시간, 자연, 그리고 현대사회 간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정신 없이 바쁜 일상'에서 '한없이 평온한 무인도'로 일순간 전환된다. 둘 간에 이루는 극적인 대비가 작가의 의도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갈림길에 선 척의 마지막 모습에선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앞으로 여유를 가지고 '자연스럽게' 살아갈 척의 모습이 연상된다. 

 

척이 천신만고 끝에 그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왔을 때, 4년 내내 그리워했던 켈리는 제리의 아내가 되어 있다. 둘은 아직 서로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지만, 각자의 현재 위치를 잊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책임감에 따른 이별. 조난이라는 비극으로 인한 안타까운 이별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결말이다. 이기심보다는 도리와 배려를 중시하는 태도. <캐스트 어웨이>의 결말은 '애틋한 사랑'보다 '시간의 흐름에 순응하는 삶의 지침'을 향해 있다.

 

최우선의 가치, 도리

 

자본주의의 폐해와 갑의 횡포가 논란의 대상이 될 때마다, 기득권층은 되묻는다. "누구 때문에 이만큼 먹고 살게 됐는데!?" 그들이 내세우는 기술 개발, 경제 발전. 물론 훌륭하다. '맥가이버' 같다. 기발하고 신통하다. 문제는 무인도에 홀로 떨궈진 척이다. 척은 우리 사회의 저소득층 같다. '맥가이버'는 훌륭하지만, '집에 두고 온 맥가이버'는 아무리 훌륭해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지금 내 손에 없다는 생각에 화만 돋군다. '기득권층이 쌓은 탑''집에 두고 온 맥가이버'일 뿐이다.

 

도리란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 길을 말한다. 그런데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땅히' 지켜야 할 건, '도리'가 아닌 ''이 돼 버렸다. 반면 척은 무인도에 조난 당한 상황에서도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한다. 영화 초반의 일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무인도에서 버텨야 할지 막막한 데다가 며칠째 굶주려 기운도 없을 때지만, 파도에 밀려 온 기장의 시신을 섬까지 끌어온다. 지갑 속의 가족 사진을 셔츠 주머니에 넣고 묻은 다음, 지갑에서 확인한 이름과 생년을 돌에 새겨 기념한다. 최소한의 도리를 다한 후 척이 내뱉은 한 마디는 꽤 의미심장하다. "So... that's it."

 

자연을 중심으로

 

4년이 흘렀다. 무인도는 조금, 척은 많이 달라졌다. '자연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적응시킨 것이다. 옷차림부터 수염과 머리칼, 피부색, 체격이 '오지 원주민 저리가라'. 스케이트는 도끼날로 변신하고 윌슨도 머리가 자랐다. 돌에는 척만의 달력이 새겨져 있다. 상어에게 조용히 하라고 소리칠 정도로 자연에 완벽하게 적응한 모습이다. 톰 행크스만의 유머 코드가 빛을 발한다.

 

인간의 생존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 먹고 자고 싸기. 척이 표류한 무인도는 다행히 수면욕과 배설욕을 해결할 수 있는 따뜻한 곳이다. 문제는 식욕이다. 처음엔 이리 뛰고 저리 뛰어도 피라미 한 마리 건지기 힘들었다. 게살도 불을 피우는 법을 터득한 뒤에야 겨우 핥을 수 있었다. 지금의 척은 아주 노련하다. 고기잡이쯤은 한 큐에 처리한다. 이 장면에서 역시, 톰 행크스 캐스팅이 완벽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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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스트 어웨이>가 보여 주는 또 하나의 극적인 대비가 있다. 이는 좀 더 은밀하다. 페덱스 동료 스탠의 부인 메리는 암 투병 중이다. 척이 4년 간 무인도에서 자연과의 싸움을 이겨 내고 스스로를 지켜 집으로 돌아왔을 때, 메리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발생한 질병인 암은 아무것도 없는 미개한 자연보다도 인간에게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과연 도구라고는 전혀 없는 무인도에 비해 인간이 사는 대륙이 무조건 살기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볼 일이다. 

 

무색한 문명

 

집안의 가보인 회중시계를 돌려주고자 켈리의 집을 찾은 척. 켈리는 척에게 우유를 권한다. 그냥 우유, 2% 저지방 우유, 크림과 섞은 우유. 척은 고르기만 하면 각양각색의 우유를 마실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기발한 세상의 모습이다. 돌아온 척을 환영하는 파티에서도 괴리감은 부각된다. 쌓여 있는 게다리, 원터치로 켜는 라히터, 실내등. 불씨 하나 얻으려고 종일 나무를 비벼 대던 무인도에서의 지난 날을 생각하면 허무하고 우습기 짝이 없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모든 것이 편하고 쉽지만, 그때만큼의 기쁨은 없다. 어렵게 불꽃을 피웠을 때나, 훈련에 훈련을 거듭해 고기잡이에 성공했을 때 느꼈던 쾌감과 보람. 훌륭하고 완벽한 문명사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것들이다. 사회에 돌아와 척이 느꼈던 건 회한이나 허무함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이 시대에 충분히 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지나치는 곳곳의 희열이 무엇보다 안타까웠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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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리는 4년 전 척과 함께 타던 차를 그대로 남겨두었다. 끊임없이 등장하는 새로운 모델, 업그레이드된 제품. 우리는 조금이라도 뒤쳐질까 광고를 따라 이 차에서 저 차로, 이 냉장고에서 저 냉장고로, 줄기차게 갈아탄다. '얼리 어답터'라며 유행의 최전선을 달리고 있다는 데 얼빠진 듯 뿌듯해하기도 한다. 켈리는 결혼해 새 가정을 꾸렸다. 그러나 척과의 추억이 깃든 차를 처분하지 않고 차고에 그대로 간직해 두었다. 조난 당한 약혼자에 대한 도리이자, 효율성보다 추억을 소중히 여겨서다. 척은 회중시계를, 켈리는 차를 돌려줌으로써 각자의 인생을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서로간의 매듭을 지은 셈이다. 과거에 대한 진심과 배려는 미래에 더없는 보탬이 된다. 진심이라면, 그 어느 것도 헛되지 않다.

 

우리가 사는 이유

 

'무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몰라도,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는 게 <캐스트 어웨이>가 전하는 메시지다. 켈리와의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척은 생각한다. "나는 지금 내가 무얼 해야 할지 안다. 그저 숨 쉬며 살아가는 거다. 내일이면 또다시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고, 파도에 또 뭐가 실려 올지 모르는 거 아닌가."

 

<스트 웨이> 3-1 먼, 리에 Link

<스트 웨이> 3-3 Link

시나리오 메시지 MONZAQ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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