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들이 필리핀을 택하는 이유

 

역시 필리핀? 

 

비행 시간 3시간 40, ② 170여 편의 빈번한 항공편, ③ 연간 한국인 방문객 100만 명, ④ 7천여 개의 섬으로 구성, ⑤ 무비자 출입국 가능, 3개월 무비자에 1년 이상 체류 가능. 우리나라 범죄자들이 도피처로 필리핀을 택하는 이유다. 물리적인 조건만 따져도 위험성은 충분해 보인다. 이게 다가 아니다. ⑦ 우리에게 친근한 영어를 사용한다, ⑧ 법 체계가 느슨하다, ⑨ 돈으로 여권 위조, 즉 범죄 전력 은폐 및 도피자 신분 위조가 가능하다, ⑩ 일부 경찰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는 점까지. 국내 범죄자들이 필리핀이 아닌 다른 나라로 도피하는 이유가 궁금해질 정도다.

 

경찰청에 따르면, 해외 도피 범죄자는 2012년 기준, 1,100여 명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필리핀에 체류 중인 범죄자는 130명 정도. 조사 기관 및 시점에 따라 도피처에 대한 조사 결과는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중국과 미국, 필리핀, 세 나라가 주요 도피국으로 파악된다는 점이 유일한 공통점이다. 최근 몇 년 간 필리핀은 항상 세 나라에 포함되어 왔다. 필리핀의 인구와 면적이 각각 중국의 1/13, 미국의 1/33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주목할 만한 결과다. 필리핀 도피 범죄자 및 그들이 현지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벌이는 범죄에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 방안이 절실한 이유다.

 

자유로운 A 씨

 

한국에서는 엄연한 범죄자 신분인 A . 그의 한국 출국, 필리핀 입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A 씨의 설명이다. '한국에서 회사 인수·합병(M&A) 일을 하다가 손해를 봤다. 내가 투자했던 사람을 찾아가 화풀이를 하는 과정에서 폭력을 썼다. 전치 7~8주의 상해를 입혔다. 기소 중지가 돼도 출국 금지는 내려지지 않는다. 정상적으로 여권을 제시하고 출국했다. 범죄 규모가 대단히 크거나 검·경찰이 따로 지시할 경우 출국을 금지시키는데, 나는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금전적인 문제로 폭력을 행사한 거기 때문에 출금 금지 조치까지는 없었을 거라 생각했고, 반신반의하며 나왔다.'

 

A 씨의 필리핀 생활을 지켜봤다. 버젓이 차를 운전하고 다니며, 누구에게도 제제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그는 필리핀 여성과 동거 중이다. 동거 중인 여자친구는 그의 범죄 사실을 전혀 모른다고 한다. '다른 동남아 국가들도 많은데 굳이 왜 필리핀을 택하냐고 묻는다면, 우리나라 60~70년대 같은 상황, 즉 돈이면 다 되는 곳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라고 하겠다.' A 씨는 필리핀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 범죄를 저지르는 이유

 

피의자의 생활고

 

경제사범의 경우 보통 많은 돈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도피한다. 극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은 일정한 직업 없이도 대부분 편하게 현지 생활을 즐긴다. 반면, 대부분의 도피자들, 즉 경제사범을 제외한 나머지 폭력사범은 가져온 돈마저 탕진하고 마땅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리기 일쑤다. 필리핀에서 범죄 도피자 신분으로 일자리를 얻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얼마든지 있다. 범죄 도피자 B 씨는 인근 공장에서도 매니저급으로 한국인들을 많이 기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문제는 여권이 없으면 아예 지원조차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이들은 당장의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자연스레 다른 범죄자들과 가까워지고, 더 큰 범죄를 공모(共謀)하기에 이른다. 범죄 전력 탓에 또다른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게 그들의 변이다.

 

피해자의 밤문화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필리핀 클락'을 입력하면 골프, 밤문화, 항공권 등이 연관 검색어로 뜰 만큼 클락은 한국인들이 필리핀 골프 여행지로 많이 찾는 곳이다. 저렴한 비용으로 겨울 골프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 골프장 관계자에 따르면, '고객 중 75~80%가 한국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이들 가운데 70%가량이 퇴폐 관광 목적으로 방문한다', '순수하게 골프가 좋아서 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덧붙였다.

 

여행지에서 그곳의 문화를 즐기는 것은 마땅한 권리이자 훌륭한 추억거리다. 그것이 밤문화나 퇴페 문화라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얼마든지 이를 누릴 수도, 여행의 목적으로 삼을 수도 있다. 문제는 이 때문에 범죄자의 타겟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거다. 범죄자들로부터 소지품과 현금을 탈취 당하거나 술값에 바가지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약을 탄 줄도 모르고 음료수를 받아 마셔 의식을 잃기도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고 난 뒤다.

 

예정된 피해자

 

범죄의 시작

 

방문한 관광객이 모여 드는 밤거리에서 대상을 물색하던 범죄자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형성한다. 범죄는 점차 조직적, 지능적으로 탈바꿈한다. 막연하게 대상을 찾아 거리로 나서는 게 아니라, 필리핀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애초부터 범죄의 표적으로 삼는 것이다. 먼저, 저렴한 비용으로 자유롭게 여행하려는 자유 여행객들의 정보를 수집한다. 여행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인터넷 카페, 포털 사이트의 문답 서비스를 통하면 충분히 가능한 작업이다. 범죄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피해자와 피의자는 필리핀 자유 여행을 목적으로 엮인다. 정보 공유 및 비용 절감을 위해 출국 전 서로 간의 핸드폰 번호 교환은 기본이다. 홀로 떠난 해외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인은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다. 더 빨리 친해지고 더 쉽게 경계를 푼다. 사전에 온라인상에서 대화를 나눈 바 있고, 현지에서 자기를 반겨 주는 이들이라면 더욱 그럴 만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번호까지 알려준 놈들이 납치범으로 돌변해 자신을 위협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필리핀의 위협

 

필리핀에서 납치·실종된 피해자 홍석동 씨의 모친 C . 그녀는 직접 필리핀으로 아들을 찾아 나섰다. 우선 범인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 범인의 집에서 아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아들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집 안 곳곳에서 여러 개의 여행 가방이 눈에 띈다. 수많은 피해자들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이미 언론을 통해 납치 당한 후 간신히 살아 돌아온 피해자들을 비롯해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은 실종자 및 그 가족들의 사례가 수차례 공개됐다. 최근 몇 년 간의 많은 피해 사실이 드러난 상황. 하지만 여전히 필리핀 자유 여행은 인터넷상에서 핫한 소재다.

 

필리핀에서는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어 있다. 한국인 범죄 도피자가 총기를 소지한다? 총기 소지를 합법화하는 대신 각 총기마다 고유 번호를 매겨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는 미국, 프랑스 등의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리 체계상 불법 매입이 어려울 뿐더러, 환율상 편법을 동원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필리핀에서는 범죄자들도 비교적 적은 돈으로 불법 총기를 손에 넣을 수 있다. 한국인 범죄자들에게 있어 총이란, 범죄 대상의 경계를 피하면서 대상을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게다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절호의 수단이 된다. 한국은 총기 소지 불허 국가다. 한국인들은 상대의 총기 소지 가능성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반면, 공포감은 쉽게 고조된다. 현지 한국인 범죄자들이 한국인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서지 못하는 우리 경찰

 

코리안 데스크

 

필리핀에 파견된 한국 경찰 D 씨는 '한국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필리핀으로 도피해 생활하고 있는 단순 범죄 도피자들을 일일이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고 털어놓는다. '한 해 백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 여행객을 전부 조회하기에는 조회 대상이 방대할 뿐 아니라, 인권 침해의 소지도 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막연하게나마 한국인 수배자가 필리핀으로 도피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파견 수사를 진행할 뿐'이라며 '정확한 수치는 알 길이 없다'고도 했다.

 

필리핀 경찰청 내 한인 관련 강력 범죄를 담당하는 '코리안 데스크'. 2010 10월에 설치된 '코리안 데스크'에는 현재 단 한 명의 한국 경찰관만이 업무를 맡고 있다. 바로 D 씨다. 그나마도 그는 자체적으로 수사를 진행할 수 없다. 단독 수사권이 부여되지 않아서다. 필리핀 경찰이 수사를 요청하는 건, 또는 필리핀 경찰이 한국 경찰의 수사 요청을 받아들인 건에 한해서만 공조수사를 할 수 있다.

 

범인 송환 불가

 

홍석동 씨 사건 이후 범죄의 심각성이 드러나면서 우리 정부는 해당 사건의 수사를 요청했다. 세 명의 범인이 필리핀 국제 납치 전담반에 의해 검거됐다. 하지만 필리핀 경찰은 피해자의 행방은 물론 생사 여부조차 밝혀 내지 못하고 있다. 피의자를 국내로 송환하기도 쉽지 않다. 우리 경찰이 직접 심문에 나설 수 없는 것이다. 국제법에 따라 필리핀에서 범죄를 저지른 경우, 그곳에서 해당 형기를 마쳐야만 출국이 가능하다. 강제 송환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국인이 한국인을 상대로 납치와 살인을 수차례 저질렀다. 하지만 정작 한국 경찰은 더 이상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나 피해자와 그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필리핀 경찰의 조치를 멀뚱히 지켜볼 뿐이다. 범행지가 필리핀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범인들도 국제법 규정을 잘 알고 있다. 수감자 E 씨는 '죽어도 여기서 죽지, 한국 경찰에 넘겨질 일은 없다'고 장담하듯 말한다. 납치·살해범의 경우, 한국으로의 송환은 끔찍한 미래에 대한 예고다. 필리핀에 비해 처벌 규정이 엄중할 뿐 아니라, 평생을 범죄자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송환을 피하기 위해 그들은 국제법을 악용한다. 국내법에 따라 처벌 당하느니 제3의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법망이 느슨한 필리핀에서 형을 살면서 시간을 끌겠다는 거다. '현지에서 해당 형기를 마쳐야 한다'는 국제법. 이를 교묘히 이용하는 필리핀 범죄자. 그들의 꼼수를 처단할 묘책은 없는 걸까.   

 

범죄인 인도 조약

 

대응책은 있었다. 범죄인 인도 조약. 'a 국가에서 범죄를 저지른 자가 b 국가로 도주한 경우, a 국가는 범죄자에 대해 b 국가에 인도를 요청할 수 있으며, b 국가는 이에 응할 의무가 있음'을 국가 간에 합의·규정하는 조약이다. 우리나라는 필리핀과 해당 조약을 맺었다. 문제는 그 절차에 있다.

 

국내 담당 검사의 해당 범죄인 인도 신청 한국 검찰청의 접수 → 한국 법무부로 전달 한국 외교부로 전달 주 필리핀 한국 대사관의 요청 필리핀 외교부의 수락 필리핀 법무부의 평가 및 요청 필리핀 현지 법원의 접수 필리핀 경찰의 범죄인 인도 준비(체포) 완료 재판을 통한 인도 여부 결정 필리핀 법무부에 통보 필리핀 외교부에 통보 한국대사관에 통보 한국 외교부에 전달 한국 법무부에 전달 담당 검사에게 범죄인 신병 인수   

 

우리나라 검사가 해당 범죄자 송환을 요청하고 그의 신병을 확보하기까지 밟게 되는 절차다. 한눈에 봐도 답답할 정도다. 가장 오랜 기간이 소요되는 건 단연 재판이다. 인도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필리핀 현지에서의 재판은 일을 더디게 하는 주된 요인이다. 결과적으로, 범죄인 인도 조약에 의해 국내로 송환된 범죄인은 현재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조약의 의미가 무색한 실정이다. 범죄인 인도 조약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장치 마련이 시급하다. 언제 끝날지 모를 필리핀의 재판 결과만 손 놓고 기다리기에는 피해자들의 고통이 심각한 수준이다. 피해자 홍석동 씨의 부친 G . 그는 수개월 간 아들의 행방을 좇았다. 끝내 아들을 찾지 못한 G 씨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목숨을 끊었다.

 

필리핀 드림

 

노숙자로 전락한 도피자, 20년 이상의 장기 도피자의 생활고. 일부 언론에서는 범죄자의 필리핀 도피가 비극적 결말을 맺을 수밖에 없음을 강조하기도 한다. 더 이상의 필리핀 도피를 막기 위해서일 거다. 이런 설득이 도피처를 찾는 범죄자들에게 먹힐지 의문이다.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본다. 기존 도피자들이 벌이는 범죄에 대한 확실한 처단, 우리 정부의 적극적 개입만이 범죄와 도피를 동시에 뿌리 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노숙자가 되거나 더 잔인한 범죄자가 되거나. 필리핀 도피자들에게 주어진 단 두 개의 갈림길. 더 잔인한 범죄자가 되더라도 돈으로 신분을 세탁해 언젠가는 풍요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범죄자들의 허황된 필리핀 드림. 과연 우리 정부는 통쾌하게 밟아 줄 수 있을까.

 

 

국, 핀 | 2013-03-17 | KBS Link

대한민국 그림자 MONZAQ

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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