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진실 규명은 여러 사람 체면 구기는 일, 누명 벗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프롤로그

 

줄거리

입사 면접을 보러 가기 위해 만원 전철에 올라탄 카네코 텟페이. 웃옷이 문에 끼어 손으로 당겨 보지만 쉽게 빠지지 않는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한 여중생이 치한이라며 카네코를 잡아 세운다. 역무실을 거쳐 경찰서, 유치장까지 끌려가면서 계속해 무죄를 주장하지만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렇게 4개월 간 유치장 신세를 지다 보석금을 내고 가까스로 풀려난 피고인 카네코. 하지만 재판 결과, 유죄가 확정되면서 결국 3개월 징역형을 선고 받는다. 목격자도, 증거도 충분치 않은 만원 열차 내 성추행 사건. 영화는 카네코와 변호인의 입장에서 사법 체계 및 언론이 답습하는 어리석은 관행을 면밀히 보여 준다. 아울러 재판관의 사명과 법의 기본 원칙을 돌아보게 한다.

 

일본 영화를 제대로 감상한 건 이번이 고작 세 번째다. 섬세하고 치밀한 구성 빼고는 찾아서 볼 만큼의 구실을 찾지 못해서다. 내가 가지고 있던 일본 영화에 대한 인상은 지나치게 잔잔하거나 반대로 너무 그악스러운 장면을 담는다는 거다. 높은 평점을 자랑하는 일본 영화는 대개 공포나 드라마다. 공포는 물론 애정·멜로드라마 역시 선호하지 않는 장르이다 보니 기회가 없었다.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2006)는 현실 세계의 부조리를 약자의 관점으로 조명했다는 점에서 구미가 당겼다. 일본 영화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인 '내 취향 아닌 영화 제목'에 잠시 멈칫했지만, 보고 난 지금 볼 만한 영화로 추천한다. 대사 중 작가 정신이 드러난 부분을 추렸다.

 

첫마디

<쉘 위 댄스>(1996) 감독으로 유명한 '수오 마사유키'의 작품이다. 그는 대부분 각본과 연출을 모두 담당한다. <쉘 위 댄스>와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역시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둘은 같은 드라마 장르이면서도 '코미디'와 '다큐식'이란 차이가 있다. 주목할 점은 두 영화 모두 '비주류'의 입장에서 풀어냈다는 점이다. 일본의 음지 문화인 '사교 댄스'와 사법계의 '유죄 추정'을 소재로 삼았다. 처음 스크린에 띄운 메시지는 감독의 의지를 시사한다. '열 명의 죄인을 놓친다 하더라도 죄 없는 한 사람을 벌하지 말지어다.'

 

 

피의자의 적은 경찰, 검찰, 그리고 변호사

 

체포 후, 경찰 왈

 

한 번 더 얘기하는데, 솔직히 인정만 하면 금방 풀려나. 딱지 떼는 거나 마찬가지야. 약식으로 벌금만 물면 석방이라구. 자, 지장 찍어.

 

간단히 해결하는 법

영화에선 '당번 변호사'라 부른다. 체포된 후 처음 한 번은 무료로 변호사를 붙여 주는데, 이 변호사를 '당번 변호사'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국선 변호사와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다소 무성의하고 직업의식 부족해 보이는, 의뢰인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해야 하는 카네코의 입장에 감정이 몰입되는 대목이다.

 

'이대로 재판까지 가도 절대 못 이긴다. 인정하고 벌금을 내면 바로 내보내 주겠다.' 계속 그 얘기뿐입니다. 근데 난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다구요.

재판은 고된 일이야. 이런 경미한 사건이라도 혐의를 부인하면 유치장에서 지내야 돼. 재판까지 가면 피해자 증언이 끝날 때까지 석 달, 아니 반년 동안 갇쳐 있게 될지도 몰라. 처음에 인정했으면 벌금 5만 엔으로 끝날 일을... 게다가 재판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유죄 선고율은 99.9%이야. 무죄 판결이 나는 건 천 건 당 1건이라구. 합의로 끝낼 수 있는 치한 사건을 재판까지 가져가 봤자 자네에게도 좋을 게 하나도 없단 얘기야. 물론 변호사로서 짓지도 않은 죄를 인정하라고 할 순 없지만, 이게 일본의 현실이라네. 혐의를 인정하고 합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사건은 종결되고, 내일이라도 당장 나올 수 있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지금처럼 혐의를 부인하면 3주간 여기서 취조를 받게 될 거고 기소까지 당하면 재판을 해야 하는데, 무죄 판결을 받아내려면 적어도 1년은 걸린다구. 그렇게 되리란 보장도 없고. 지금 인정하고 합의하면 모든 게 끝나. 합의를 하자면 돈이 필요한데, 가까운 사람 중에 돈 준비해 줄 만한 사람 있나?

난 안 했어요.

그래. 미안하네. 하지만 재판은 정말 힘들어. 아마 자네는 상상도 못 할 거야. 어쨌든 밤새 잘 생각해 보고 이 번호로 연락해.

 

성추행범을 감싸라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카네코의 변호를 맡게 된 '스도' 역시 여자다. 그녀의 성추행범에 대한 반감은 남다르다. 판례가 미치는 사회적 파급력도 알고 있다. 열차 내 성추행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피'해'자에겐 의심 가는 피'의'자가 보인다는 주장. 수많은 피해자를 돕기에도 시간이 모자란 판국에, 피의자를 도우라니 그녀는 영 내키지가 않는다. 재판에서 승소하기 위해 애를 써야 하지만, 승소해도 피의자 편에 섰다는 게 찜찜해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다. 피의자와의 첫 만남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하는 '스도'. 상사의 종용으로 맡게 된 사건에서 '스도'의 심경은 어떻게 달라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전 치한이 싫어요.

그렇겠지. 좋아하는 건 범인밖에 없을걸. 그래서? 그 청년은 치한이 맞는 거 같아?

모르겠어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는데... 어쨌든 전 못 하겠어요.

뭘?

변호 말이에요. 국선 변호사 때 자백 사건 몇 건 맡아 본 게 다에요. 범행 사실을 부인하는 경우는 경험이 없다구요. 그리고 지금은 범죄 피해자 구제가 제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험이 없으니 한번 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치한범 변호라니...

본인은 아니라고 한다면서?

그렇긴 하지만, 증거가 없으니까 발뺌하는 거겠죠. 선배님은 남자라서 이해 못 하실지 모르지만 당한 쪽에선 대체로 느낌이 와요. 이 사람 좀 수상하다 싶은.

변호사가 그런 소릴 하면 어떡하나? 수상하다고 다 범인이면 우리가 무슨 수로 이겨?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형사 재판의 철칙, 몰라?

여자가 치한을 잡는 데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아세요? 무섭고, 수치스럽고... 재판까지 열리면 법정에서 증언도 해야 되잖아요. 치한 범죄에서 무죄가 많이 나오면 다시 과거로의 역행이라구요. 이제야 겨우 재판관이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는데.

잘 들어. 치한 원죄(寃罪; 억울한 죄) 사건에는 일본 형사 재판의 문제점이 명백히 드러나 있어.

아직 원죄인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에요.

의뢰인이 진범이라는 확신이 들면 언제든 손 떼도 좋아. 그러니 일단 맡으라구.

 

나즈막한 취조

때로는 코믹하게, 때로는 끔찍하게, 영화에서 그려지는 용의자 취조 현장을 보면 폭력과 인권 침해는 드문 일도 아니다. 그런데 목청 높여 위협하는 그들보다 더 무서운 검사가 이 영화에 등장한다. 미야모토 타카시 검사(키타미 토시유키 扮). 당장 내일 자유의 몸이 된다 해도 벌금형을 거부하고 한사코 결백을 주장한다면, 그는 기회만 노리며 얄팍은 꾀를 쓰는 데 서툴 가능성이 높다. 내 억울함을 밝히겠다고 남을, 그것도 성추행을 당해 힘들어 하고 있을 여중생을 매도할 리 만무하다. 검사는 이 점을 노린 걸까?

 

자네는 절대로 치한이 아니야. 그렇지?

네.

그렇다면 피해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네. 그렇지?

아...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0.1%의 무죄율

유죄 판결 확률이 99.9%라는 게 사실인가요?

아, 그건 피의자가 혐의를 인정한 사건도 포함했을 때의 수치에요. 인정하지 않은 건만 따로 보면 좀 더 높습니다.

얼마나요?

3% 정도 돼요. 100건 중 3건은 무죄 판결이 났습니다.

 

사실 무죄율은 제삼자의 입장에선 크게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사건의 진실, 범인의 진위를 가리는 게 우선이다.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실제 범죄를 저지른 경우나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가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네코처럼 당사자의 입장에 처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통계치는 그간의 사례를 토대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는 근거가 된다. 한결같이 결백을 주장해 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 상황에서 0.1%라는 수치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얘기였을 거다.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 내거나 십수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출소 후 다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서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그들도 카네코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극소수의 이야기일 뿐이라며 외면하기엔 그들의 울분이 너무 깊다.

 

우리나라의 무죄율을 보자. 10년 전에 비해 1심의 경우 4배, 2심의 경우 3배가량 증가했다. 무죄율은 기소된 피의자 가운데 무죄가 선고된 비율만을 나타낸다. 범죄 사실 여부 혹은 범인 검거율 등 제반 사항은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따라서 무죄율만으로 사법 현실을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의자에게는 그 추이는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10년 새 3배 가량 늘었다 해도 겨우 1% 안팎에 불과한 무죄율. 소모되는 비용과 시간, 노력까지 감안하면 누명을 벗고자 고군분투하는 이들을 맥 빠지게 만든다.

 

<1심·2심 무죄 현황>
단위: 명, %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1심	계	2,151	2,447	2,221	2,362	3,187	3,941	4,587	5,420	5,772	5,858
무죄율		0.17	0.17	0.18	0.21	0.26	0.29	0.37	0.49	0.63	0.63
구속구공판		279	253	195	160	165	167	223	190	163	202
불구속구공판		870	1,032	892	975	1,427	1,740	2,027	2,274	2,187	2,336
구약식		1,002	1,162	1,134	1,227	1,595	2,034	2,337	2,956	3,422	3,320
2심	계	406	759	851	895	1,116	1,166	1,252	1,203	1,145	1,142
무죄율		0.70	1.28	1.51	1.77	1.88	1.81	1.84	1.72	1.70	1.83
구속구공판		41	96	92	89	111	71	102	110	87	116
불구속구공판		365	663	759	806	1,005	1,095	1,150	1,093	1,058	1,026
* 무죄율은 1∙2심 선고 인원 대비임					출처: 대검찰청 (검찰통계시스템)

 

출처: 대검찰청 (검찰통계시스템)

 

그래도 봐줄 수 없어

 

유죄율 때문에 재판관은

당분간 형사재판 쪽은 안 하려고요.

그럼 안 되지. 우리가 상대하는 건 국가 권력이야. 그때마다 풀 죽으면 형사 사건 변호는 할 수가 없어. 재판관이 무죄를 겁내는 건 어제오늘 일도 아니잖아.

 

겁을 낸다? '무죄율 1%'는 재판관에게 가해지는 무언의 압력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재판관이 진정 두려워 해야 할 것은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진실의 왜곡'임을 명심해야 한다.

 

아무리 변호사와 많은 준비를 했다 해도 법정에서의 답변에 의해 한순간 유죄가 돼 버릴 수 있습니다.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어요. 단판 승부죠. 있었던 일을 있는 그대로 말하면 된다는 변호사도 있지만,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예상 밖의 질문을 받으면 머릿속이 하얘집니다. 직접 겪었던 일조차 혼란스러워지죠. 재판관에게 악의가 있는 건 아닐 겁니다. 매일같이 거짓말쟁이를 만나 '도둑질 해선 안 된다', '남에게 해를 입히면 안 된다', 설교를 반복하다 보니 본인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는 거죠. 무서운 건 '99.9%의 유죄율'이 재판의 '결과'가 아니라 '전제'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유죄율 때문에 변호사는

한쪽에선 무죄율이 억울한 피의자의 희망을 꺾고, 다른 한쪽에선 유죄율이 법을 집행하는 이들을 옥죄고 있다.

 

'유죄율 99.9%'는 변호사에게 참 편리한 거요. 유죄를 받으면 당연한 거니까 비난 받을 일 없고, 무죄를 받아내면 영웅이 되니까 좋고.

 

유죄추정의 원칙

해당 변호사의 속내는 이랬다.

 

피의자한테 왜 합의하라고 한 거에요?

그날 접견은 정말 웬만하면 다른 사람이랑 바꿔 달라고 하고 싶었어. 오후에 한 판결이 있었거든. 징역 1년 3개월 실형. 끔찍했지. 전철 안에서의 외설 혐의. 보석금 5백만 엔. 전과도 없고 처자식까지 있는 성실한 샐러리맨인데 피해자 증언 끝나고 재판관한테 갔더니 뭐랬는 줄 알아? '5백만 엔 낼 능력 있으면 당장 가서 피해자하고 합의 하고 와라. 그러면 집행 유예로 해 주겠다.' 말이 돼? 우린 어떻게든 무죄를 증명하려고 안간 힘을 쓰고 있는데, 한창 재판 중에 그런 소릴 하는 거야. '무죄 추정'은 커녕 '유죄 추정'이지. 그 자리에서 욕이라도 퍼붓고 싶었어. 난 합의를 권하려고 했던 게 아냐. 다만 '결백하면 재판에서 밝혀질 것이다, 재판관은 알아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실제로 재판이란 게 어떤 건지 알려주지도 않고 무책임하게 싸우란 말만 할 수가 없더라구.

 

판사의 능력

당연한 소리지만, 판사는 항상 2백 건 이상의 사건을 맡고 있어요. 대부분은 혐의를 인정하는 명백한 범인이니까 나쁜 사람을 심판한다는 말이 틀린 건 아니죠. 문제는 그 와중에 피고인의 말을 진지하게 듣기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게다가 단기간에 많은 사건을 판결하지 않으면 근무 평가가 나빠지니까, 판사의 능력이 처리 건수로 평가되니까, 빨리 끝낼 궁리만 하는 거죠.

 

 

증거인멸은 범인만 하는 게 아니다

 

검찰이 하는 일

사건 직후의 피고인 주장이 전혀 조서에 나와 있지 않아요. 피해자 조서에도 여성 목격자가 역 사무실에 갔던 거나 상의를 잡아당기고 있었다고 피고가 주장한 사실이 빠져 있고.

있는 조서를 내놓지 않고 있는 거 아냐? 불리한 증거는 숨기곤 하거든.

설마요...

일단 기소했으면 반드시 유죄를 받아내는 게 검찰이 하는 일이야.

 

진짜 웃기는 얘기

오늘은 주로 경찰의 허술한 조사 과정을 밝히려 했어요. 아직 제출하지 않은 증거를 모두 내놓으라고 한 거죠.

증거를 전부 보여 주고 범죄 유무를 결정하는 거 아니었어요?

어떤 증거를 내놓는가는 작전에 따라 달라져요. 문제는 조사 단계의 증거는 검찰에게만 있고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다는 거죠. 증거를 개시(開示)하라고 요청은 할 수 있지만, '이런 증거가 있을 테니 제출하라' 이렇게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으면 안 돼요.

어떤 증거를 숨기는지 알 수가 있나요?

알 수 없죠. 추측할 뿐이죠. 진짜 웃기는 얘기죠.

 

별게 다 증거

이거 당신 거에요? 어떻게 된 거죠?

어떻게 된 거냐니... 그게 제가 치한이란 증거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재판관에겐 나쁜 인상을 주겠죠.

당신에게도 그렇겠죠. 당신 말대로라면 남자는 다 범인이겠네요?

그 말이 맞아요. 모든 남자에겐 동기가 있어요. 피해자 바로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알리바이도 없고.

그러니까 그걸 찾아주는 게 변호사 아닌가요?

 

내 방의 잡지

얼마 전 입양특례법이 개정되면서 입양 절차가 까다로워졌다. 입양을 원하는 양부모의 자격 검증도 강화됐다. 입양을 하려면 '알코올 중독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이에 대해 정부 정책의 허술함을 고발한 사례가 있다. 알코올 중독 상담센터, 보건소, 병원, 그 어느 곳에서도 이를 증명해 주지 않는 데다가 보건복지부도 어디서 어떻게 근거 자료를 만들어야 할지 모르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알코올 중독'을 증명할 순 있어도 '아님'을 어떻게 증명하란 거냐며 전문가들조차도 황당해 한 것이다.

 

'무'를 입증하기는 '유'를 입증하기보다 어렵다. 출근 시간 만원 전철 안에서 내가, 내 손이 무얼 하고 있었는지는 본 사람도 없고 흔적도 남지 않는다. '없는 것'과 '아닌 것'은 말 그대로 증인도 '없고' 증거도 충분치 '않다'. 이에 비하면 유죄 입증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한 명의 용의자가 지목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용의자의 모든 일상은 그를 위협하는 법정 증거 자료가 될 수 있다. 없으면 비정상인 '야동'도, 지하철 문을 등지고 섰던 사실도 모두 그가 성추행범임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카네코는 '너니까 못 믿지!' 하는 엄마의 잔소리마저 누가 듣고 추궁할까 소스라친다.

 

이거 피고인 방에 보관해 둔 소장품, DVD와 책 맞죠?

소장품이요?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버리지 못해 내버려뒀을 뿐입니다.

'치한 지옥'. 평소에도 치한에 흥미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친구가 준 것 중에 우연히 치한물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이 잡지엔 세일러복 차림의 소녀가 실려 있는데, 여학생한테도 흥미가 있었군요?

그 누드 잡지에 우연히 그런 게 있었을 뿐이지, 여학생에 대해 특별히 흥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상입니다.

 

 

진실 규명은 여러 사람 체면 구기는 일

 

무죄병

결과만 놓고 보는 사회. 문제의 핵심을 착각하고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언론. 씁쓸하기 그지없다.

 

그쪽은 어때? 판사가 오오모리 씨지?

맞아요.

평판 좋던데?

그래요? 언론 쪽 평판은 최악이던데요?

'무죄병' 말이지? 마치 무죄로 판결하는 게 나쁜 짓인 것 같군. 그게 병이라면 다른 판사들한테도 좀 옮아 줬음 싶구만.

 

판사 1

방청을 원하면 조금 좁혀서 앉아 보도록 하죠. 괜찮으시죠?

 

판사 2

정원은 20명입니다. 나중에 들어오신 분은 퇴실해 주세요.

지난번 판사님은 좁혀 앉으라고 하셨는데...

여긴 제 법정입니다.

무슨 소리야!?

정숙한 가운데 심리를 진행하고 싶으니 정원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1이 생각하는 형사재판 제일의 사명

괜찮으니까 뭐든지 물어보세요.

혹시 무죄를 선고했던 판결 중 '유죄였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 '유죄 판결'이란 사실상 '검찰이 합리적인 의심을 허용치 않을 만큼 유죄를 증명해 냈는가'를 판정하는 작업입니다. 증거는 없지만 피고인이 진범일지도 모른다? 이런 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걸로 판사가 고민한다면 증거 없이도 검찰의 주장에 따라 무죄인 사람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거든요. 결국 검찰관의 증명을 숙고해 유죄라는 확신을 얻을 수 없다면 무죄인 겁니다. 형사재판의 최대의 사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진실을 규명하는 것? 공평히 임하는 것? 공정성? 최대의 사명은, 죄가 없는 사람을 벌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사 교체

담당 판사가 1에서 2로 바뀌면서 카네코의 위기는 극에 달한다.

 

그건 그렇고,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판사가 바뀌었어요.

네? 그런 경우도 있나요?

네.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에요.

지금까지 한 심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없었던 게 되진 않아요. 다만 새 판사는 지금까지 법정에서 오간 내용을 문서로만 보고 판단하게 될 겁니다.

 

용기가 필요해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데 필요한 건 증거뿐만이 아니다. 증거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후 '무죄'가 추정되면, 이땐 '용기'가 필요하다. 흐름을 거슬러 0.1%에 속하는 것, 남들이 다 'Yes'할 때 'No'라 말하는 것. 가진 것이 많아서일까, 그게 왜 그렇게 어려울까? 비열함의 정점을 찍는구나!

 

판사가 왜 바뀐 걸까요?

판사의 전근은 자주 있는 일이지만, 밀려난 걸 수도 있어요.

왜요?

요전에 무죄 판결을 내렸던 두 건이 고등법원에서 다 뒤집혔거든요.

그래요? 그럼 그것 때문에 좌천?

글쎄요. 무죄 판결이 나면 누가 좋을까요?

피고인과 그쪽 관계자겠죠.

경찰과 검찰은?

그쪽이야 열받겠죠. 체면 구기는 건데.

무죄 판결을 내리는 건 경찰과 검찰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에 반항하는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는 출세를 할 수가 없겠죠. 어차피 재판소도 관료 조직이고 조직 안에서 인정 받고 싶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니까. 피고인 좋은 일 시켜 봤자 얻어지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죄만 남발한다고 해서 출세가 보장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무죄 판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한 거죠.

그렇군요. 처음 알았네!

 

 

법관을 대하는 자세?

 

인질사법

본인이 한 말이 정확히 적혀 있지 않으면 절대 조서에 서명하지 말아요.

벌써 했는데요?

이미 한 건 다음번 취조 때 정정해 달라고 하세요. 앞으론 함부로 서명하지 말고. 재판 때 불리한 증거가 되니까. 조서는 취조관의 작문이에요. 묻는 말에 답했을 뿐인데, 완성된 조서에는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겠습니다' 같은 1인칭으로 되어 있죠? 문체뿐 아니라 뉘앙스도 바꿔 적어 유죄의 증거로 만들어 버려요. 예를 들면 '손이 우연히 엉덩이에 닿는 경우도 있겠지?'라고 물어 '그렇겠네요' 하면, '나는 우연히 손으로 엉덩이를 만지고 말았습니다' 하고 자백한 것처럼 조서를 쓰는 거죠. 끌질기게 정정을 요청하세요. 여기에 매일의 취조 상황을 반드시 기록해 둬요. 사건 당일의 일도 뭐든 좋으니 기억나는 대로 전부 메모하세요. 당시 승객들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도 좋아요.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저... 우연히 닿았던 적이 없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대답했어요.

혐의를 부인하면 계속 구류하면서 자백을 독촉할 겁니다. 이런 걸 '인질사법'이라고 하는데, 그런 비열한 수법에 넘어가선 안 돼요.

 

사람들을 불러 모아라

왜 사람들 안 데려왔어요? 이렇게 텅 비어 있으면 져요! 방청석을 가득 채워서 재판관이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들어야 된다구요.

 

돈 내면 풀어줄게

보석금. 금시초문이다. '보석'은 '보석금을 받거나 보증인을 세우고 형사 피고인을 구류에서 풀어 주는 일'을 이른다. '보석금'은 '보석을 허가하는 경우에 내게 하는 보증금'으로, '보석보증금'과 같은 말이다. 죄를 지어 내거나 해를 끼쳐 건네는 돈 외에도 '풀려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돈이 있었다. 이유가 있어 받아 두는 돈이겠지 싶으면서도 26살의 나이에 이제껏 직장도 구하지 못한 카네코의 입장을 생각하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몇 번 보석 신청을 했었는데... 왜 안 된 거에요?

보석 신청이 거부되는 건 이럴 때에요. 첫째 피의자의 주거가 일정치 않을 때, 둘째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있을 때, 셋째 피의자가 도주할 우려가 있을 때. 대개는 두 번째, 증거 인멸이 이유래요.

박사 다 됐네. 근데 증거랄 게 없잖아?

피해자를 협박할 순 있죠. 그래서 피해자 증언이 끝나면 보석을 허락하는데, 조석 조건이 사건 구간의 전철은 못 탄다는 거에요.

와! 보석금은 얼만데?

2백만 엔(2천2만 원).

지금까지 '재판'은 나쁜 사람들을 심판하는 거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돈 내고 석방이라니...

그러게. 재판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단하는 거잖아.

 

에필로그

재판이란!

피고인을 징역 3개월에 처한다.

내 마음 한 구석엔 재판관은 알아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얼마나 재판이 혹독한 것인지 스스로를 다잡으면서도 진실이 아니니까 유죄가 될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한 재판관이 '진실은 신만이 안다'고 말했다는데, 그건 틀린 말이다. 최소한 나는, 내가 범인이 아니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이 재판에서 심판할 수 있는 자는 진정 나뿐이다. 최소한 나는 재판관을 심판할 수 있다. 당신은 실수한 거다. 나는 결백하니까. 처음으로 이해했다. 법정은 진실을 밝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재판은 모아들인 증거를 가지고 피고인이 유죄인가 무죄인가를 임의로 판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유죄가 되었다. 그게 재판소의 판단이다. 그래도...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다.

피고인이 이 판결에 불복할 경우 14일 이내에 항소할 수 있습니다.

항소하겠습니다.

 

끝마디

부디 당신이 심판 받기를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심판해 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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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 (2008)

I Just Didn’t Do It 

8.8

감독

수오 마사유키

출연

카세 료, 야쿠쇼 코지, 세토 아사카, 모타이 마사코, 야마모토 코지

정보

드라마 | 일본 | 143 분 | 2008-12-11

글쓴이 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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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메시지 ^MONZA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