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톨로지 - 김정운


7쪽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도 안 받아들인다!"라는 기막힌 문장으로 일본 문화를 정의한다. ...... ​아기가 태어나면 신사에 가고, 결혼식은 교회에서, 장례식은 절에서 하는 일본은 세계의 모든 종교가 공존하는 나라다.  

32쪽
우리의 생각은 '그림'인가, 아니면 '문장'인가? ...... 그림으로 생각하는 것을 '심상image'이라고 한다. ...... 즉 심상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다. 문장은 그 다음이다. 복잡한 일이 있을 때만 우리는 문장으로 생각한다.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 생각을 보다 명확히 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릴 때가 있다. 문장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논리적 사유는 언제나 2차적이다. ...... 그래서 성찰을 직업으로 하는 지식인은 비겁할 수밖에 없는 거다. 치열한 싸움이 다 끝나고, 해가 진 다음에야 어슬렁거리며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겁함은 지식인의 존재적 본질이다. 

40쪽
정보 독점은 이제 불가능하다. 세상의 권력은 정보를 엮어내는 편집자들의 몫이다.

64쪽
사람들은 아이팟에 환장했다. '누르기'와 '만지기'는 질적으로 다른 경험이다.

85쪽
'노트'와 '카드'. 이 둘 사이에는 아주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편집 가능성editability'이다. ...... '실력이 있다'는 것은 편집할 수 있는 자료가 많다는 뜻이다. 이렇게 카드로 축적된, 편집 가능한 자료를 '데이터베이스'라고 한다. 이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기가 오늘날에는 너무 쉬워졌다. ...... 이제 실력은 '잘 찾아내는 것know-where'에 있다. '검색'이 곧 실력이라는 이야기다. 

91쪽
'권력'도 지식이다. ...... 자신의 지식에 따라 조직을 편집한다는 이야기다. ...... '기업'도 지식이다. ...... 시장에 대응하는 기업의 경영 지식이 조직도에도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 

95쪽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상호작용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은 정서 공유를 통한 상호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가장 큰 동기는 관심의 공유, 즉 지식과 정보의 공유다. 

101쪽
'아마도'의 의문을 갖고 검색하는 것은 능력이고 실력이다.

126쪽
오케스트라 단원은 다르다. 아무리 잘해서 수석 단원이 되어도 지휘자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 ...... 연주장에서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도 오직 지휘자뿐이다. 관객은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 되어 있는 본능을 억누르고 지휘자의 뒤통수만 바라봐야 한다. 지휘자만 혼자 신난다. 춤추고, 발을 구르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온갖 폼 나는 동장을 혼자만 취한다. 클래식이 망해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156쪽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문학에서는 객관성이란 단어를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으로 대체한다. 상호주관성의 시대에는 각 주체들 간의 소통이 중요하다. 그래야 서로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 혹은 상호주관적 시점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원근법 회화에서 소실점의 위치는 화가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관찰자들에게, 자신이 선택한 지점에 소실점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는 태도는 지극히 권력적이다. 문제는 이처럼 '권력이 은폐된 소실점'을 사람들은 여전히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159쪽
시간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을 '분절화'한다. 시간을 숫자로, 마치 셀 수 있는 물체처럼 만든 것이다. 일단 하루를 24시간으로 쪼갠다. 하루는 모여 일주일이 되고, 한 달이 된다. 그리고 365일이 모여 1년이 된다. 중요한 것은 이 1년이 매번 반복된다는 사실이다. 아니, 반복된다고 믿는 것이다.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안 무섭다.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한 해가 잘못되면 그 다음 해에 다시 잘하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가 오는 것을 매번 그렇게 축하하며 반기는 것이다. 


161쪽
도대체 고대 인류는 왜 사물마다 문양을 그려넣은 것일까? 대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다. 세계 어느 곳에서 발견되든, 문양은 언제나 대칭적이고 규칙적이다. 내 소유의 물건은 내 통제 하에 있다는 권력을 확인하려는 것이다. ...... 원시인류의 모든 문양에서 대칭성과 기하학적 특징이 먼저 나타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현 가능성' 때문이다. 비대칭적인 것들은 재현하기 어렵다. 동물이나 식물을 흉내 낸 구체적인 문양도 재현하기 어렵다. 재현 가능성이란 반복 가능하다는 뜻이고, 반복 가능성은 곧 통제 가능하다는 뜻이다. 규칙과 질서를 부여해 무한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시도는 시간과 공간, 두 영역 모두에 해당된다. 

 

229쪽
그 무한한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별을 도무지 감당하지 못해 사람들은 별자리를 만들어냈다.아무 관계 없이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별들을 이어 선을 긋고, 그 선들을 모아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 사람들은 그 막막하고 캄캄한 밤하늘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별자리를 통한 밤하늘의 편집은 낭만적이다.

167쪽
역원근법은 말 그대로 정반대다. ...... 앞쪽이 작고, 뒤쪽이 크다. ...... 인식론의 차이다.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상대방의 시선, 혹은 제3의 시선이 더 중요하다. 역원근법은 지금 그림을 보고 있는 내 반대편의 시선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내게 가까울수록 작아지고, 내 반대편에 있는 타인의 시선에 가까울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 동양 회화에 나타나는 관점은 제3의 초월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 많은 경우,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조감도'의 형태를 취한다. 조감도는 한자 뜻 그대로 '새가 내려다보는' 관점이다. 대개 이 관점은 마음의 관점, 즉 상상의 관점이 된다. 그림 속의 관점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관점이 섞이게 된다. 

172쪽
3차원을 2차원으로 편집하는 방법은 문화적으로 아주 다양하게 발전해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회화 기법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재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다. ...... 르네상스 선원근법의 확립 이후, 서구에서 구성된 모더니티의 핵심은 바로 '관점의 통일'에 대한 강박이다. 이는 객관성, 합리성, 표준, 통일성의 철학으로 전개해나간 근대 서구 사상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근대에 들어오면 서구의 이 같은 세계관은 권력과 맞물리며 '식민지주의'라는 구체적 형태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다. 시선 자체가 권력이 된다. 

176쪽
시선은 권력이다. 권력을 가진 자만이 시선을 소유할 수 있다. ...... 돈이 생기면 좋은 곳에 별장을 짓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시선을 소유하기 위해서다. ...... 삶의 여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시선을 구매한다. 오늘날 '조망권'이라는 애개한 권리가 법적 다툼이 되는 이유는 권력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79쪽
근대 권력의 시선은 사람들의 삶을 아주 구체적이고 정교하게 지배한다. 시선의 지배가 구체화된 공간이 바로 감옥, 학교, 군대, 병원이다. ...... 근대 교육의 목표가 되는 '성장'과 '성숙' 혹은 '발달'의 본질은 타율적 규제의 내면화에 있다. 

211쪽
독일인들이 가장 분노하는 것은 바로 사생활 침해다. ...... 아파트 관리실에서 '곧 반상회가 열린다'는 방송이 거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방송이 가능하냐는 거다. 외부의 방송 스피커가 집 안에 설치되어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집주인 의사와 상관없이 아무 때나 방송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 이처럼 독일과 한국의 공간 의식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난다. 
각 문화의 특징을 가장 빨리 파악하는 방법은 해당 문화의 공간 편집 방식을 살펴보는 것이다. 공가 편집이야말로 각 문화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를 바꾸는 것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공간 편집을 달리하면 된다. 

226쪽
오프사이드 규칙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감독의 공간 편집 전략을 한눈에 보여줄 수 있는 시각적 매체다. 축구가 전 세계인의 스포츠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TV 중계 때문이다. ...... 80~90년대에 내가 독일 유학할 당시, 매일 저녁 봤던 독일 분데스리가의 중계 화면은 지금의 월드컵 중계에 전혀 뒤지지 않았다. 그날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 뉴스 화면은 그 어떤 액션 영화보다도 흥미진진했다. ...... 그렇게 화려한 화면을 보다가 K리그의 성의 없는 화면을 보려니 다들 짜증 내며 돌아서는 거다. 

233쪽
군기와 같은 외부 권력에 의해 강요되는 규칙과 규율은 논리적으로 설명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 강제된 규율을 익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몸으로 배우는 것이다. 

254쪽
편집숍은 다르다. 상호작용적이다. 어느 한쪽에 권력이 집중되지 않는다. ...... (백화점, 도서관 등의) 계층적 분류 체계와 달리, (편집숍의) 네트워크적 지식은 각 정보들의 관계가 고정적이지 않다. 유동적이며 변화무쌍하다. 맥락에 따라 관계가 매번 달라진다. ...... 우리가 해외여행을 가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그곳의 분류, 전시의 에디톨로지를 즐기는 데 있다. 

267쪽
청소년은 처음부터 불량한 개념이었다. ...... 스탠리 홀은 이 정소년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로 명명하며 그 불안정한 특징을 더 노골화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청소년 개념을 편집할 사회구조적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급격한 산업화 때문이다. 일단 대량생산과 대량 소비를 위해 훈련된 노동력이 급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기존의 소규모 도제제도와 같은 교육 방식으로는 당시 사회가 필요로 하는 대규모 노동력을 키워낼 수 없었다.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가족 또한 더 이상 교육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가족에서 교육의 기능이 떨어져나갔다. 교육은 모두 학교에 맡겨졌다. 학교는 자신들이 담담해야 할 교육의 필요성을 정당화해야 했다.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불안하고, 위험하고,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청소년의 표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275쪽
덧붙이자면, 사회적 경력 학력을 제외하고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학력 경력 없이도 자신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상당히 깊은 자기성찰이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다. 명함을 내보이지 않고 자신을 얼마나 자세하게, 그리고 흥미롭게 서술할 수 있는가가 진정한 성공의 기준이다. 

282쪽
빌 게이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이들이 스스로 의미를 편집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다. 일방적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재미없는 거다. ...... 잡스의 정서적 모순적 자극적 내러티브는 듣는 이들의 적극적인 해석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를 주체적으로 편집해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의미는 스스로 만들어낼 때만 의미 있다. ...... 진리를 계몽하던 시대는 지났다. 듣는 이로 하여금 '주체적 편집의 기회'를 제공해야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297쪽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갖고 태어나도,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문화적 필요가 형성돼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 안정된 사회에서 천재는 나타나기 어렵다. 안정된 사회란 발달 과정이 정형화된 사회를 뜻하기 때문이다. 천재는 한 사회에서 다른 사회로의 이행기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 천재는 사회 문화의 변동이 한 역사적 개인에게 편집되어 나타나는 우연적 결과다. 

317쪽
독일, 프랑스 등의 지식인 사회의 철학적 깊이와 권위에 눌린 당시 미국이라는 후진국의 유학생들에게 신설 학문인 심리학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 수백 년에 걸쳐 형성된 유럽 대륙의 개념적 사고를 좇아가기보다는 실험을 통해 확인된 '팩트'와 숫자를 논하는 것이 훨씬 간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의 미국 자본주의는 심리학과 같은 개인주의에 기초한 새로운 학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 개인주의에 기초한 심리학으로의 과감한 선택이 오늘날의 미국사회를 가능케 했다는 거다. ...... 미국식 경영학은 심리학적 지식의 실천적 변용이다. ...... 모든 성과를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미국식 심리학 전성시대는 오늘날 '피로사회'라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모순으로 이어진다. 

323쪽
반면 주체의 자율성이 극대화된 성과 사회의 본질은 '긍정성'이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미국식 개인'이다. 미국식 개인에게 나타나는 능력의 무한 긍정은 독일식 개인의 금지와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고 위험하다는 것이 한병철 교수의 주장이다. 끝 모르는 자기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 근대적 개인의 일원론적 발달과 성장에 관한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후기 근대적 '우울함'이다. 

347쪽
아기는 자신이 느끼는 정서가 엄마를 통해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알게 된다. 동일한 정서가 다르게 표현되는 것을 느끼며, 아기는 자신이 엄마와는 다른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자아', 즉 주체의 탄생이다. 상호작용이 먼저고, 주체는 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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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몽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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